잡문/기타 잡문2017. 11. 13. 23:55
멍 때리기
고등학교 땐 자주 멍하게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 중 절반은 책상에 엎드려 잤다. 나머지 절반 중 일부는 복도로 나갔고 일부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했으며 일부는 자리를 움직여 친구들과 잡담을 나눴다. 쉬는 시간은 사실 10분이라는 제한 시간 때문에 특히 가치가 있어서, 성인이 된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시간 동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더 의미있을지를 생각하곤 했다. 

멍해지는 건 꽤 즐겁다. 요즘 같이 차가운 날씨일 때면 쉬는 시간동안 잠시 창문을 열고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곤 했다. 운동장은 대개 텅 비어 있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축구를 하는 인파들도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이 되어야 나오곤 했다. 체육 수업을 받는 학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멍하게 바깥을 보면 풍경은 보통 3갈래로 나뉘어서 누런 땅바닥과 초록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건물층 그리고 푸른 하늘로 나뉘었다. 지금이야 밖을 볼 때마다 미세먼지를 생각하기 일수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건 별로 개념이 없었다. (아마 그 때가 더 공기가 안좋았을 테지만) 

언젠가 그 즐거움에 대해서 친구에게 얘기했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는게 뭐가 즐거운 거야? 

막상 나이가 들어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때가 되면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되새김질 하게 된다. 사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살고 있는 이유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멍 때리며 있을 수 있는 여유를 잡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효리네 민박>에서도 아이유가 자주 멍 때리던데. 그 모습을 보면 꽤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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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시, 에세이2017. 11. 12. 23:27

저자 : 장강명
출판사 : 한겨레출판(주)
초판 1쇄 발행 : 2016년 8월 18일
전자책 발행 : 2016년 9월 13일

1. 이런 여행 에세이 참 좋지 
예전에 임경선이 썼던 <자유로울 것>이라는 에세이에서 <5년 만에 신혼여행>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것인지 싶을만큼의 솔직함이 드러난 에세이라는 평이었다. 그 부분을 꽤 흥미롭게 읽었던 탓에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리디북스에서 100% 포인트백을 해주는 행사를 하는 덕에 바로 사서 읽게 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읽었던 탓에 꽤 기대를 했었는데, 실제로 에세이 류의 책에서 흔히 보이는 허세같은 것이 없어서 꽤 좋았던 것 같다. 특별히 어떤 대단한 철학이나 감동 같은 것은 없을지언정, 글을 읽는 순간 동안에는 꽤 유쾌했다. 마치 장강명이라는 저자의 여행 일기를 들쳐 본 것 같은 기분은 느끼게 해줬으니까. 

날짜 별, 시간대 별로 공간의 흐름에 따라 깔끔하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고, 아내 HJ와 어떤 대화를 했으며, 뭘 마시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뭐 이렇게까지 시시콜콜하게 다 적었을까 싶을만큼 밀도 있게 에세이가 쓰여 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이 사람은 대체 여행 가서 여행을 즐긴 건가 아니면 자기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뒀다가 에세이를 쓰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아래와 같이 예문을 가져와 보고자 한다. 

나는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이번에는 산 미구엘 필젠을 시켰다. 여행 책자에는 '한국에서 수입되는 산 미구엘은 대부분 필젠이지만 필리피노들은 라이트를 훨씬 더 즐긴다'고 써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처럼 라이트를 먼저 마셔본 건데 내 입맛에는 필젠이 훨씬 더 맛있었다. 산 미구엘은 라이트와 필젠을 포함해서 모두 열한 종류가 있다고 한다.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 열한 종류를 모두 마셔보겠다는 다짐이 있었는데, 리조트 식당에는 산 미구엘이 라이트와 필젠 두 종류밖에 없었다. 공항 앞에 있던 가게나 카티클란으로 가는 길에 들렀던 식당에도 그 두 종류의 산 미구엘과 '레드호스'라는 다른 필리핀 맥주밖에 없었다. 

<5년 만에 신혼여행>은 여행 에세이이다. 보통 여행 에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적어도 1달 간 다양한 곳을 여행했고, 거기서 느꼈던 점을 모아서 책 한 권을 낸다. 어떤 사람들은 1년의 여행이 담겨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수십 개 국가를 여행했던 경험을 모아서 한 권을 낸다. 근데 <5년 만에 신혼여행>은 진짜 별 게 없다. 딱 3박 5일, 보라카이라는 아주 평범한 관광지를 갔다 온 경험을 써나간 책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솔직히 나도 여행광까지는 아니지만, 살면서 적지 않은 곳을 여행했다. 일본이나 중국도 여러 번 가봤고, 태국이나 베트남 그리고 싱가포르 같은 동남아도 꽤 다녔다. 북미 대륙이나 유럽 대륙도 심지어 이집트까지도 가봤으니 웬만큼 여행이라면 적지 않게 다녀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여행갔다 왔던 것에서 이 작가만큼의 밀도가 있었을까? 

솔직히 장강명과 그의 아내 HJ가 경험한 여행의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다. 그냥 해당 여행지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여행 상품을 이용했고, 평범한 식당을 오갔으며, 맥주도 같은 종류로 정말 여러 병을 마셨다. (이 에세이에선 산 미구엘이 지겨울 정도로 언급된다.) 

그런데도 이야기의 밀도는 아주 빽빽하고 풍부해서, '와, 내가 여행갔다온 다음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정리해서 글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여행의 순간순간에 느낀 점들을 여우처럼 교묘하게 기술해뒀는데, 그 부분도 아주 흥미롭고 잘 읽힌다. 뻔한 듯 뻔하지 않은 이야기가 숨겨 있다. 예를 들어 보통 이런 식이다.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여행 에세이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어느 순간 작가가 생각했던 이야기나 혹은 꿈, 그리고 이상으로 들락날락하면서 글에 밀도를 높인다. 그런 뒤엔 어김없이 다시 여행으로 돌아와서 시덥잖은 농담을 날린다. 고단수다. 

나도 나름 일주일 뒤에 여행을 가는데, 여행을 다녀온 뒤에 꽤나 밀도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여행 중에 이것저것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뒤에 이걸 어딘가에 꼭 기록해둬야겠다. 나도 장강명처럼 내 시간을 더 깊게 가져가 보고 싶다. 

2. '5년 만에 신혼여행' 3줄 평 
- 쓸데없는 철학이나 감상은 배제한 채 철저히 자신이 보고 생각한 걸 써준 것이 너무 좋다 
- 솔직함으로만 치면 에세이들 중 단연 Top이다. 
- 작가 장강명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느낌. 그의 글보다도 사람에게서 더 매력이 느껴졌다. 


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7. 11. 10. 23:50
다이어트 중독 
다이어트는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처음엔 불편하던 몸이 교정되는 기분이 들고, 몸에 맞지 않던 옷이 다시 맞기 시작하며, 거울을 볼 때는 기분이 좋아지고, 몸무게를 측정하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매일 보는 사람들에겐 별 효과가 없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 보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반응도 화끈해서 기분이 좋다. 

매일 운동하고, 식욕도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하는 건 꽤 힘든 일이긴 하다. 다만 이건 습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첫 1주일이 가장 힘들고, 그 다음부터는 그저 정해진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3주째부턴 기분좋을 일만 남는다. 3주만 되어도 식욕은 드라마틱하게 떨어져 있고, 운동량은 늘어나 있으며, 몸무게는 확실하게 줄어있다. 그 뒤엔 앞서 했던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 

문제는 살을 다 뺀 뒤다. 

솔직히 살을 뺀다고 해서 삶이 급격히 변하진 않는다. 옷은 새로 사야 하고, 사람들에게 몇 번 칭찬을 들으면 그 뒤엔 일상이 있을 뿐이다. 내가 그저 살이 쪄 있던 상황이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다 평범한 몸무게로 살아왔던 것이라 내가 성취한 몸무게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은 지루하고, 식욕을 억제한 채로 그대로 살아가는 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다시 절제를 버리고 열심히 음식을 탐닉한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요요왔네.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며 고소해하거나 혹은 한심하다는 듯 비웃으며, 겉으로는 나를 걱정해준다. 나 역시 그들의 속내를 읽고, '요요왔지. 하하, 뭐 어쩔 수 없는걸'이라고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힘들게 빼놓고 나서, 살이 다시 찌면 어떡해. 아깝지 않아?'라고 말해준다. 

솔직히 말해 아깝지 않다.

마치 이런 거다. 살을 빼놓은 만큼 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갖추게 된 셈이다. 몸무게가 2~3키로도 아니고 10키로 이상 빼게 되면 살이 찌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살을 빼는 건 1~2달이면 충분하지만 다시 찌우는 데에는 1년이 걸린다. 이게 어떻게 그렇게 되냐면, 막상 먹는 것에 집중하고자 해도, 내가 푸드파이터라던가, 유명한 먹방 BJ도 아닌 이상 줄어든 위를 늘리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나서 다시 살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 그럼 다시 다이어트를 하면 된다. 그럼 처음 1주만 잘 버티면 또 다시 즐거운 다이어트의 시간이다. 다이어트는 언제나 그렇듯 항상 즐겁다. 아니, 이게 미친 말 같지만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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