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7. 1. 23:18
여행 가고 싶다. 
갑자기 여행 가고 싶다. 

이왕이면 푸른 숲이라면 좋겠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 혹은 유럽이면 좋겠다. 이왕이면 도시가 보이지 않는 곳이길 바란다. 그러나 숲, 그리고 그 숲이 있는 산에 올라가서도 그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지 못 사는 나라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곳이라면 좋겠다. 굳이 고르자면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좋다. 사람이 별로 없는 서부 미국, 혹은 유럽 헝가리 정도가 마음에 든다. 

사람 목소리가 안들리는 곳이면 좋겠다. 
음악 같은 걸 따로 켜놓지 않아도, 바람 소리만으로도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 
땅거미 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되면, 산 정상 바위에 앉아서 셔츠 바깥으로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지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에어컨을 켤 수 있는 설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면. 그럼에도 내가 그로 인해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길 바란다. 

근처에 박물관이나 동물원은 없길 바란다. 인위적으로 매력적인 공간은 없는 것이 좋다. 내가 그 장소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없던 장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할 정도는 아니다. 마치 살인사건을 묘사한 소설은 좋아하는 주제에 정작 살인 자체에는 끔찍함과 공포심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어둑어둑 사위가 흐릿해지면 내 주변이 졸린건지 내가 졸린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 때 난 내 주변이 느끼는 욕망에 순응하는 사람이고 싶다. 저녁 6시는 6시 답게, 저녁 9시는 9시 답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새벽에 어떤 목적을 갖고 일어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새벽 4시, 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보려고 일어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 때 난 무슨 감정을 느끼고자 했던 것일까? 난 정말로 거기서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단지 내가 계획한 어떤 계획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지, 그것이 내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미안하다. 

그럼에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기차를 타고 싶다. 사람이 참 많은 도시를 가로질러 움직이고 싶다. 내 주변에 시끄러운 인파가 함께 했으면 싶다. 그 시끄러움에 방해되어 설잠을 설치다가 겨우 비행기를 타고 집에 오는 일정을 잡고 싶다. 

내가 설마 유럽에 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인도? 아니면 남미? 

여하튼 난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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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국내소설2017. 6. 30. 23:48

저자 : 김영하
출판사 : 문학동네
초판 1쇄 발행 : 1996년 8월 20일 

1. '스스로를 파괴함'을 생각하며 
나도 어릴 적엔 죽음를 고려해본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생각한 죽음은 삶이 힘들다거나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을 통해 내가 끝장날 수 있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의 끝단에 달려 있는 쾌감(이걸 쾌감이라 써도 되는 감정인가?)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우리 집은 아파트였는데,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옥상 난간이 있었다. 난간에 올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가슴 정도 높이 되는 난간은 가볍게 힘을 주면 발을 짚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면? 한 발 짝만 걸어가면 죽음이었다. 죽음. 그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극도의 공포감이었다. 공포가 크면 클 수록 왠지 모르게 그 공포의 끝단에 접근하고 싶었다. 난간에 서서 걸어가면서, 내가 만일 여기서 떨어지면 그건 어떨까. 라는 공포를 맛보곤 했다. 이 공포는 아주 미묘했다. 안전한 상태가 되고나면 다시금 그 공포를 맛보고 싶단 기분을 느끼곤 했다. 혹시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맛보고 싶어서 그렇게 안달난 걸까? 

김영하 작가는 이 책을 통해 흥미로운 실험을 한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선택으로 보게 된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물론 이 책은 자기계발 도서가 아니라서, 그럴싸한 영웅담이 서술되진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 유디트'들'은 편안하지도, 억울하지도, 후련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으며 단지 건조하고 냉정한 표정을 짓는다. 상상의 범주 속에서 쉽게 발견되는 표정이 아니기 때문에, 두고 두고 살펴보고 싶은 표정이다. 

죽음에 아무런 장벽이 없는 순간, 삶은 잉여가 된다. 특별히 두려움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는 건 자유로워지고, 생각은 제한이 없다. 얼마 전에 읽은 이나가키 에미코의 '퇴사하겠습니다'가 생각난다. 그 책엔 퇴사를 당연한 선택으로 생각하는 순간, 회사 생활이 잉여가 된 직장인이 묘사되어 있다. 기존의 생각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또 자유롭다. 

2. 한 가지 궁금했던 점. 소설 맨 처음.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은 대체 왜 등장하는 걸까? 
이 책이 5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 중 첫번 째 장이 '마라의 죽음'이라는 부분이다. 1793년에 제작된 유명한 유화 <마라의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소설은 마라의 표정에 집중한다. 편안하지도, 억울하지도, 후련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건조하고 냉정한 표정이다. 한 때 미술 교과서에서 <모나리자>의 표정에 집중했던 것처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마라의 표정을 본다. 덕분에 나도 구글을 통해 <마라의 죽음> 그림을 계속 관찰했다. 

소설에 특별한 설명은 없다. 단지 마라의 표정이 죽음을 묘사하는 적정선을 지키고 있다고 쓰여있을 뿐이다. 

내 생각엔 이 소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에 관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 아닐까. 죽음에 대해 들어가기 이전에, 죽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에 관해 일단 생각해보자는 것. 죽음의 표정을 생각해보지 않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길 때, 아주 평범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에 평범함이 어딨겠냐만은 적어도 픽션에서 맞이하는 뻔한 죽음으로 이야기를 이해하지 않도록 한다. 조금이라도 그 죽음에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다시금 상상하고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3. 인상깊은 문구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소설은 삶의 잉여에 적합한 양식이다.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일 수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나쁘냐면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나빠. 그건 K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종자야.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멋진 작업이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내게 구원일 수는 없었어요."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

4.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3줄 평 
- 죽음의 표정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발견한 소설 
- 죽음, 혹은 스스로를 파괴함에 장벽을 제거함을 통해 삶에서 오히려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이 발견된다. 
- 난 갇혀 있는 사람일까 혹은 자유로운 사람일까. 


Posted by 스케치*
독서/미분류2017. 6. 29. 23:41



저자 : 장 자크 루소 / 편역 : 이환
출판사 : 돋을새김 
전자책 발행 : 2015년 8월 10일 

1.  에밀을 읽고 
에밀엔 몇 가지 거르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 책이 유아기부터 성년기까지 5단계로 교육의 단계를 나누는데, 이 중 4, 5단계를 담당하는 청년기와 성년기는 특히 거르고 싶다. 이 내용이 당시에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시대적인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긍정할 수도 없다. 1단계 유아기에 나오는 ‘유모’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귀족 아이’에 대한 부분은 알아서 걸러야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 더해서 직업교육, 성교육, 종교 등등도 모두 빼놓고 보고자 한다. 

상당히 많이 거른 것 같지만 가장 근본적인 교육관 자체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내가 본 루소의 교육관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회환경, 인간관계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성과 자유가 곧게 서 있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좋아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이 책 ‘에밀’에 나오는 수준만큼도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떤 부분들을 읽으면서 난 나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어릴 적 어떤 순간들은 부모님께 참 억울하고 화가났던 경우가 있었다. 집에서 친구와 함께 놀다가 부모님이 기르시는 난 화병을 깨트려서 몇 시간이고 혼났던 기억이라던가. 부모님께서 내 말투를 고치겠다고 ‘~해줘’라는 말보다는 ‘~해주세요’라는 말을 쓰라고 강요했던 기억. 윤리 교육을 위해서 어릴 때부터 여러 번 쓰고 외웠던 성경공부들. 

나 자신을 두고 한 차례 실험해보고 싶다. 과연 내가 어릴 적에 루소가 잘못된 교육이라고 지적한 부분을 제대로 고쳐서 교육받았다면 난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역사엔 만일이 없고, 사람의 삶은 한 번인지라, 이런 교육 실험은 결국 내 자식대에서 진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2. 인상깊은 문구 
교육은 세 가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자연 ` 인간 ` 사물이 그것이다. 

사람에게든 사물에게든, 아이는 결코 주인이 아니다. 아이에게 지배나 복종의 관념이 깃들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의 욕구가 정당한 것이라면 분별 있게 대응하라. 원하는 것을 갖다주지 말고 그쪽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라.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위상에 맞는 합리적 결론에 이를 것이다. 

나는 에밀이 거칠어지기보다는 거만해지지 않을까가 더 걱정이다. 에밀이 ‘부탁합니다’라는 식으로 정중하게 명령하기보다는 ‘그렇게 해주세요’라는 식으로 거칠게 부탁하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에밀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 아니라 그 표현 속에 깃들어 있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선이나 악,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 등을 이해하는 일은 아이의 영역이 아니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아이는 아이로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이 질서를 거역하면, 우리는 설익고 맛도 없는 과일을 속성으로 재배하는 것과 같다. 아이를 꼬마 박사와 애늙은이로 만들어서 좋을 게 뭐 있겠는가? 아이는 보고 느끼는 데 그 나이에 맞는 사유 방식을 활용한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라. 그 자유를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이나 파손될 만한 물건들이 있다면 치워놓아라. 아이의 손 닿는 곳에 비싼 물품을 두지 말라. 거울이나 도자기처럼 사치스러운 물건을 놓지 말되 투박하고 튼튼한 가구를 들여놓아라. 이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절대 혼내지 말라. 야단치지 말라. 그것 때문에 당신의 기분이 상했다는 내색조차 하지 말라. 마치 가구가 쓰러져 저절로 파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라. 명심하라. 그렇게 보인 인내심만으로도 당신은 엄청난 교육을 한 것이 된다. 

강요하지 않는 한, 아이는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간단하다. 그것이 이익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만 하면 된다. 모르면 불편하고, 불편하면 결국 손해이다. 알면 편하고, 그것은 결국 이익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이익, 그것만이 아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성적인 것과 관련해) 질문해 왔을 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되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대답해주기보다는 그를 침묵하게 하는 편이 더 낫다. 회피하기가 마땅치 않다면, 그래서 대답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솔직하게 대응하라.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해서 그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느니 차라리 만족시켜라. 그편이 훨씬 덜 위험하다. 

3. ‘에밀’ 3줄 평 
- 자연적 본성에 맞는 인간, 이성과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법의 시초. 
-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문. 이 책에 쓰여진 내용 중 과학적 방법론으로 입증된 주장은 몇 개나 될까? 
- 어떤 내용들은 아주 구시대적이다. 어떤 내용은 여전히 진보적이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