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국내소설2017. 6. 25. 23:11

저자 : 김영하
출판사 : (주)문학동네
초판 1쇄 발행 : 2017년 5월 25일 

1. '오직 두 사람'을 읽으며 생긴 질문과 나만의 대답 
질문 : 이 소설의 화자 '현주'는 왜 '언니'에게 편지를 썼을까? 그리고 '언니'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나만의 대답 : 현주는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자유가 차단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대학에 갈 때 전공을 선택하는 것도 아버지가 결정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바랐던 것인양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그건 아버지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현주가 갖게된 취미, 그녀의 장래, 그리고 그녀가 만나려다가 말았던 사람들까지도 어딘지 모르게 아버지가 짜놓은 삶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장래,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대체하고 있던 존재가 죽고나니, 홀로 남겨진 현주에게는 자신의 말을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린 것 아닐까. 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마음과 말을 온전히 받아서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가 없으니까. 언니라는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같은 존재일 수도 있고, 영화 캐스트 워웨이의 '윌슨'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요즘 중국에선 샤오빙이라는 인공지능 AI가 유행이란다. 실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가상의 인물과 얘길 나누는 거다. 내 감각으론 이런 게 정상적인 거라 생각이 들지 않는데, 오히려 샤오빙을 통해 위로받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창구는 늘어나는데, 막상 그 많은 사람 중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지는 건 대체 무슨 현상인걸까. 

소설 속 주인공 현주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였다. 누군가의 의지와 자유를 받아들여, 이것이 내 것인양 여기며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소설만 보면 현주라는 존재가 참 특이해보인다만, 막상 현실을 살아가는 내 자신이 현주보다 무엇 하나 더 나은 사람이라 말하기 어렵다. 나도 정말 자유롭게 살고 있는 걸까? 나도 누군가의 의지를 받아들여 그 의지를 대체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 스스로도 이런 내 마음을 터놓고 얘기나눌 상대가 없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2. '아이를 찾습니다'을 읽으며 생긴 질문과 나만의 대답 
질문 : 왜 이 소설은 '볼트'로 시작해서, '아이의 손'으로 끝날까? 

나만의 대답 : 소설의 시작과 끝이 참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양 끝단을 제거해도, 소설은 완전한 서사로 읽혀진다. 중간 이야기는 단순명쾌하다. 어느 날 마트에 간 부부가 아이를 유괴당하고, 10년 간 잃었다가 다시 되찾은 후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불행을 겪으며 파탄을 겪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이 책에 있는 모든 주인공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고 있다. 부부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아이에 집착하고, 유괴범 간호사는 아이를 갖는 것에 집착하며, 유괴당한 아이는 자신의 가짜 엄마라는 존재에 집착한다. 

소설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볼트. 정비사 출신의 가수 지망생이 오디션 무대에서 손에 쥐고 있던 볼트. 앳된 청년의 열창이 계속되는 동안 윤석은 그 작고 단단한 금속 부품만 생각했다. 저렇게 손에 아무거라도 쥐고 있다면, 쥘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참 좋겠구나. 하다못해 호두라든가, 아니면 어릴 적 문방구에서 팔던 유리구슬이라든가. 그는 자기 빈손을 내려다 보았다. 

자신이 쥐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을 상상하며, 그것에 대한 열망을 갖고 욕심을 갖는다. 막상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것마저 자신에게서 흘러내리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하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한참 뒤 다시 그것을 되찾게 되어 손아귀에 쥐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집착이었는지, 다시금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난 소설 끝 부분에서 윤석이 아이의 작은 손을 쥐었다는 문구가 참 인상깊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는 윤석에게 짐처럼 찾아왔고, 원치도 않았던 존재이다. 마치 그의 삶 전체에서 집착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한 순간에 빛나는 보석처럼. 

3. '인생의 원점'을 읽으며 생긴 질문과 나만의 대답 
질문 : 주인공 서진이 병상의 남자의 귀에 속삭였던 대사가 아주 인상 깊다. 대체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 대사는 다음과 같다.

"여자나 패는 개새끼. 넌 곧 죽을 거다. 똥오줌도 못 가리고 이렇게 평생 누워 있거나... 그런데 봐라. 난 이렇게 살아남았고, 그게 너무 좋다. 좋아죽겠단 말이다." 

나만의 대답 :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내리기 전에 서진과 인아가 서로를 규정짓는 말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서진은 인아를 '인생의 원점'이라고 부른다. 인아는 서진을 두고 '인생의 정답'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웃긴 건 서진은 인아가 자신을 '인생의 대피소'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 3가지는 각각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원점'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시작이 되는 출발점. 또는 근본이 되는 본래의 점. 2. 길이 따위를 잴 때에 기준이 되는 점. 

이 말을 보통 사랑하는 사람에게 쓸 수 있을까? 우리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할 땐 오히려 반댓말을 쓰지 않을까? 예를 들어, '넌 나의 귀착점이야.' '네가 내 마지막 사랑이야.'라는 식으로. '원점'이란 말을 쓰면 어딘지 모르게 그 자리에서 떠나야만 할 것 같고,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말을 서진은 인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소설 초반에 이 원점이란 게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이 문구에 따르면 애초부터 서진이 인아를 사랑했었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서진은 인아가 자신을 인생의 대피소정도로만 생각했다고 여기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여기는 건 자기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인생의 원점, 인생의 대피소. 두 가지는 같은 의미이다. 서진은 인아 역시 그렇게 자신을 바라봐주길 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면 인아에게 있어 서진은 '인생의 정답'이다. 그녀는 양 갈래의 선택을 한다. 힘들고 괴로운 삶 혹은 더 나은 삶. 서진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혹은 사채업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항상 양자택일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 길은 분명히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이고, 그녀가 선택한 서진은 사실 정답의 모습을 가장한 오답이었지만. 

서진에게 있어 인아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던가,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존재와 자신을 비교 나열해봄을 통해 힘든 순간을 극복할 힘이 되는 '인생의 원점'으로서 가치있었을 뿐. 그녀가 사라진 순간 그는 다시금 '인생의 원점'을 마련할 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희생양을 마련해두고, 그 사람을 보며 살아갈 힘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 미친 동기가 주인공이 말한 저 대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4. 단편마다 한 줄 평 
- 오직 두 사람 : 주인공이나 아버지나 둘 다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 자신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 아이를 찾습니다 : 현재 내가 집착하고 있는 꿈, 대상, 존재들은 정말 집착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걸 얻게 된 순간 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 인생의 원점 : 내 삶의 원점은 무엇일까? 내 자신감의 근원, 나의 가장 야비한 부분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