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6. 28. 18:21
내려오는 건 무릎이 아프더라
난 산 타는 것이 싫다. 우리 집 근처에 산 타기에 참 좋은 명산이 있음에도 함부로 산을 탈 수가 없다. 1년 전에 친구가 내게 '같이 네팔에 가서 히말라야 산맥 트래킹 하는 건 어떠냐?'라고 제안했었지만, 난 거절했다. 회사에서 워크샵으로 지리산이라던가 설악산을 가자고 얘기하면 팔색질색을 하며 다른 곳으로 가자고 제안하는 편이다. 

옛말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이 너그럽고,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롭다고 했다. 속좁은 마음을 가진 탓에 산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말하긴 싫다.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런 이상한 이유는 아니고, 대학교 졸업 즈음에 한창 취업 준비한다고 체력운동 하던 때가 있었다. 집 뒤에 좋은 산이 있으니 당연히 밥 먹듯이 산을 탔다. 취업준비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 살도 최대로 쪄있는 상태에서 운동한답시고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을 오르락 내리락했다. 산을 오르면 일단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서 참 좋았다.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는 느낌도 받았다. 

물론 건강해지진 않았다. 당시에 지원한 기업 숫자가 60곳 정도 되는 것 같다. 그 중에 탈락한 곳이 58곳이니 정말 끝도 없이 탈락했다. 어느 날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무릎이 너무 아프더라. 집에 와서 '이게 뭐지' 싶었는데, 그 날을 계기로 산을 탔다가 내려올 때면 어김없이 무릎이 아팠다. 난 아직 20대인데, 이렇게 무릎이 아플 수가 있나. 황당하고 억울했다. 취업을 위해 공채에 지원하며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내 맘대로 산도 타기 어려운 몸을 갖게 되다니. 

'오르거나, 떨어진다'라는 말은 등산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지금은 폐지수순을 밟고 있지만, 한 때 가장 어려운 시험으로 꼽혔던 사법고시 역시 등산의 느낌이 강했다. 그것도 무척 험준한 산의 느낌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상당히 무거운 등산 장비를 등과 어깨에 매고 올라간다. 이런 장비들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사법고시라는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은 가족들의 상당한 희생을 밟고 올라선다. 험준하면 험준할 수록 산은 높아지고, 산에 오르는 것에 성공하면 땅 아래를 내 발 아래 두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사법고시의 이미지였다. 

산이란 게 어디 한 두 곳인가. 대한민국은 산의 나라다. 정말 팔도 천지가 산으로 뒤덮여 있다. 어느 정도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갖는 취미가 등산이고, 우리나라 대통령도 등산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험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시험의 나라다. 정말 각종 시험과 자격증으로 넘쳐난다. 어느 정도 나이 어린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이 시험이고, 우리나라 대통령도 국내 최고의 시험을 합격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산을 좋아하는 게 나쁠 건 없다. 산이 있고 내가 있으면 당연히 산은 오를만한 것이지. 

다만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항상 힘들다. 내 무릎을 괴롭히는 건 언제나 내려올 때이다. 내려올 때 정말 살살 걸어야 한다. 조심히 발을 디뎌야 한다. 좋다고 신나게 내려오면 그게 다 무릎에 무리가 간다. 

시험에 떨어지는 건 당연히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거라 치지만, 이미 올라간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도 정말 살살 내려와야 한다. 조심히 마음을 디뎌야 한다. 좋다고 신나게 내려오면 그게 다 무릎에 무리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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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