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7. 16. 22:59
쓸모 있는 일 
군 시절, 훈련소를 마치고 부대에 배속되어 이등병이 되었을 때,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진 몰라도 당시 부대 중사 간부에게 이런 얘길 했던 것 같다. 

"저도 부대와 국가에 기여하는 일원이고 싶습니다." 

당연히 중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우리 부대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기여하고 있는 거야." 

당시 내가 부대에 있으면서 느꼈던 건 '내가 참 쓸모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하루 웬종일 훈련을 하고, 각종 잡일을 도맡아 했었지만, 솔직히 내 시야에선 그것이 어떤 쓸모 있는 일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나란 병사가 꽤 쓸모있었을지도 모른다. 국방부에서 병력집계를 할 때 수십만 명의 군 병력 중에 나도 하나의 숫자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렇게 모인 숫자는 다른 나라에게 공표되는 우리나라의 국력이고, 적국이 감히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물론 그들은 각 병사들이 엉뚱한 일에 시간을 보내거나, 훈련을 소홀히 하거나, 일을 빵꾸내거나 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겠지만 말이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일을 한다는 건 혼자 일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홀로 일을 할 땐 모든 일에 책임지는 일로 머리가 욱씬 거리지만, 함께 일을 할 땐 어깨에 힘도 뺄 수 있고 작은 실수도 가능하며 왠지 여유로움도 생기는 기분이 든다. 그 때문에 그 안에선 최고의 단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저 남들을 보조해주는 역할을 맡는 사람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런 기분을 정말 잘 보여준 게 얼마 전에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의 한 대목이었다. 

제가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저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질투라는 것은 제게 아주 낯설은 감정이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공정한 것이 무엇인가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악 분야에서는 몇 가지가 정말로 불공장합니다. 독주 연주자에게는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지는 것이 상례고, 관중들은 박수를 칠 수 없게 되면 마치 무슨 벌이라도 받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박수 갈채는 지휘자에게도 쏟아집니다. 지휘자는 악장의 손을 적어도 두 번은 쥐고 흔듭니다. 대개의 경우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런데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미처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 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시각으로 살펴보아도 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다. 실제 다른 사람들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들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내 주변에 특출난 몇 명은 (그들이 정말로 특출난 것인지 솔직히 의문이긴 하다.) 작은 일에 박수갈채를 받고 관심과 환호를 받지만, 난 내가 아무리 두 팔을 휘젓고 다녀도 그런 반응을 끌어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내가 그랬다는 것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쓸모 있는 일이 꼭 관심 받는 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혹은 관심 받지 않는 일이라 해서 그 일이 쓸데 없는 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앞서 내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다 쓸모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밝혔지만, 꼭 이 관점만으로 쓸모 있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도 너무 얄팍한 사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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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외국소설2017. 7. 15. 21:09

저자 : 로버트 A. 하인라인 / 옮긴이 : 조호근
출판사 : (주)시공사
초판 1쇄 발행 : 2017년 5월 22일 (원작 발행일 : 1959년) 

1. 이 단편 한 번 읽어보세요. 
'너희 모든 좀비들은'은 정말 짧은 SF 단편소설입니다. 짧지만 유명한 시간여행 소설이죠. 

저 같은 경우엔 리디북스에서 무료 이벤트를 해서 다운받아 읽어보았습니다만, 인터넷에서 서핑하셔도 번역된 소설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딱 10분만 시간내서 읽어보세요! 

번역본은 여기서 읽어보세요! 

이 링크에 가시면, 이 이야기가 어떤 구조인지 설명된 그림이 있고, 제가 제목으로 쓴 'I'm my own grandpa'라는 노래가 링크와 함께 소개되어 있습니다. 

2. 상상은 상상으로 깨부순다. 
2004년도에 나온 '나비효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카오스 이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시공간 여행을 하는 주인공이 과거를 바꾸려 할 때마다 더욱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 영화를 본 이후로 난 시간여행이란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시간여행이란 개념을 우린 너무 쉽게 쓰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1시간 전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하자. 2가지 옵션이 있다. 1시간 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1시간 전의 나는 존재한 채로 지금의 내가 물질적으로 움직이는 거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미 물리적으로 너무 거대한 변화이다. 전자의 경우엔 내 뇌 속에 기억되어 있는 물질이 어떤 형태로든 변화했다는 걸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엔 이 세상에 근본도 없는 물질들이 발생한 사건이다. 그것이 가져올 나비효과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아무리 작은 일에도 세상엔 정말 큰 사건이 된다며? 그 상태로 1시간이 지난다면, 우리가 맨 처음 가정했던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이 단편소설은 여기에 한 가지 더 큰 고민을 가중한다. 끊임없이 시간 여행을 하는 존재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들은 그들의 의지로 계속 시간여행을 한다. 나라는 존재는 나와 섹스를 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존재는 나가 된다.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얘기란 말인가? 애초에 나란 존재는 어디서 시작한단 말인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라는 논란보다 더 미스터리다. 갑자기 나란 존재가 생겨먹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황당무계한 스토리는 시간여행의 역설을 아주 짧은 단편에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찬사받을만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가 과거에 상상했던 것을 현재에 와서 구현해내고, 만들어낸다. 과거 로보트 태권V를 보았던 과학자가 지금은 AI 인공지능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소설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상상이 가진 한계를 다시 한 번 상상하는 것이다. 상상을 상상하고, 그리고 그 상상의 한계를 상상한다. 다시 그 한계를 깨부수는 한계를 상상한다. 이처럼 상상은 꼬리를 물고 가설화되고, 입증된다. 

3. '너희 모든 좀비들은' 3줄 평 
- 소설 요약 : '내가 나랑 해서, 내가 태어나고,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나다.' 
- 시간 여행으로 생길 수 있는 역설을 정말 깔끔하고 쉽게 그려냈다. 
- 1959년에 이미 이 정도의 상상력을 보이다니. 감탄 또 감탄. 


Posted by 스케치*
독서/역사2017. 7. 14. 23:54


저자 : 주경철
출판사 : (주)현대문학
초판 1쇄 발행 : 2016년 11월 21일
전자책 발행 : 2017년 6월 30일 

1. 책 제목에 관하여  
누군가 '인문학' 서적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1순위로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사실 서점에 가면 널린 게 인문학 책이다. 책 제목으로 인문학이라는 명칭을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작가들이 많다.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 난 그런 책을 잘 고르지 못하겠다. 인문학이라는 게 저렇게 책 한 권에 끝낼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서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탓에 저런 제목의 책이 나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실은 우리가 인문학에 기대하는 매혹적인 이야기들은 전혀 다른 이름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일요일의 역사가'라는 책 제목은 그것만으로 매력적이다. 평소 논문이나 딱딱한 전공을 공부하던 역사가가 일요일에는 폭을 넓혀 문학이나 예술, 철학에도 관심의 폭을 넓혀 역사를 버무린다는 의미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저자가 흥미롭다. 몇 년 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짤방이 생각난다. 서울대 의대에 들어간 아들이 자기 방에서 무언가 몰래 하고 있다더라. 그걸 궁금해 한 아버지가 '뭐하니?'라고 조심스레 들어가서 보니, 아들이 몰래 공업수학을 공부하고 있더란다. '일요일의 역사가'란 책 제목은 왠지 이런 느낌을 자아낸다. 묘하게 엄마 미소를 짓게 한다. 

2. 인상깊은 문구 
인상깊은 문구를 하나하나 소개하자면 정말 끝이 없다. 그 문구를 모으는 것만으로도 다시 책을 한 권 써야 할 것 같다. 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딱 2가지 정도만 빼서 소개하고자 한다. 

책 가장 초반은 신화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에게 술을 가져다 준 것으로 이미 유명한 디오니소스(로마에선 '바쿠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디오니소스의 탄생 신화를 시작으로, 디오니소스가 포함된 다른 신화 이야기로 서술을 이어나간다. 

디오니소스는 여자처럼 예쁜 얼굴과 탐스러운 몸매를 가진 미소년인 반면, 젊은 '마초'인 펜테우스는 자신의 육체적 힘을 과시하며 디오니소스의 여성스러움을 조롱한다. 국왕 펜테우스는 현실 세계의 지배자이지만 디오니소스는 영적인 영역에 있다. 현세의 권력을 가진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에게 "나는 너보다 더 강하다"고 단언하나 디오니소스는 "너는 네 힘의 한계를 모른다. 너는 네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네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답한다. 

내가 이전까지 디오니소스를 떠올리며 갖고 있던 이미지는 '향락'과 '떠돌이'에 가까웠다. 술의 신이니만큼 술과 향락을 좋아하며, 어딘지 모르게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에선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근원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실제로 로마 시대에 묘사된 바쿠스 신은 이런 이미지가 더 강조되어 있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는 내가 그 전까지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다르다. 무지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이성과 합리로 지혜를 길러나가는 서양철학의 시작이다. 

이 책에선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를 상대하며 겪게 되는 끔찍한 비극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리스 문명의 특질을 발견한다. 그리스가 왜 그토록 빛나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일까. 왜 그들이 국가와 사회, 우주에 대해서 질문하고 사유하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이 시작한 근본이 무엇는가. 저자가 신화의 한 장면에서 역사를 엮어나가는 방식이 놀랍고, 매혹적이다. 

16세기 말, 이탈리아 시골에 살았던 방앗간지기인 메노키오가 종교 재판소에 받았던 재판을 다룬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책에선 메노키오의 이야기가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 공기, 물, 불, 이 옴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입니다. 한 지고지순한 존재는 이들이 하느님과 천사이기를 원하였고, 그 수많은 천사들 중에는 같은 시간대에 그 큰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신도 있었지요. (후략) 

당대의 명사도 아니었고, 철학자도 아니었으며, 지식과 철학에 노출된 귀족이 아니었던 그저 평범한 이탈리아 방앗간지기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당시 농민들 사이에 퍼져 있던 독서 습관을 소개하며, 그들이 갖게 되었던 머티리얼한 사고 방식을 소개한다. 그 사고방식의 기반이 된 구술문화를 소개하며 상류층이 갖고 있는 문자문화와 대립하여 이를 설명한다. 

보통의 경우 역사를 공부하며, 연도를 암기하고, 당시 사람들은 '반드시 이랬다'라는 어떤 관념을 갖게 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미시적인 부분을 파고들어 그 안에 숨겨진 균열을 발견한다. 균열 속에선 정상 세계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균열은 나비효과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며 '저건 정말 말도 듣도 보도 못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어.'라는 말을 할 수 있는데, 미시적인 역사를 파헤치면 이 어처구니 없음이 나의 무지였음이 밝혀진다. 이 부분에서 어떤 파격이 느껴진다. 

3. ‘일요일의 역사가' 3줄 평 
- 주변 친구 중에 누군가 '인문학' 서적을 읽고 싶다면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 
- 미시적 역사를 문학과 철학이라는 날실과 씨실로 묶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재밌기도 재밌지만, 읽다보면 똑똑해진다는 착각이 든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