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으며 집중력 잃지 않기 
요즘 난 책을 읽을 때 쉬운 책 어려운 책 두꺼운 책을 구분해서 읽는다. 두꺼운 책은 보통 1달 정도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읽는다. 하루에 10페이지 씩 혹은 5 페이지 씩이라도. 내가 생각하는 두꺼운 책의 기준은 보통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요즘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후기까지 포함해서 딱 404페이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1권 512페이지, 2권 544페이지로 총 천 페이지가 넘는데 이쯤 되면 내 독서력으론 쉽게 거들떠 보기 어려운 난관이다.

두꺼운 책의 최대 문제점은 집중력의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멈춘 소설의 수가 상당하다. 애슐리 반스가 쓴 ‘일론 머스크’, 제러미 시겔이 쓴 ‘주식에 장기투자하라’, 움베르트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 에번 오스노스가 쓴 ‘야망의 시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책들이 그럼 재미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두꺼운 책은 대부분의 경우 얇은 책보다 재밌을 확률이 더 높다. 아니, 사실은 두꺼운 책을 고를 땐 얇은 책을 고를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고민한 뒤에 구매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블로거로부터 강력한 추천을 받은 책이거나, 혹은 내가 평소 진짜 관심있는 분야의 책이거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에번 오스노스의 ‘야망의 시대’ 같은 경우 내가 읽어본 비소설 분야 책 중에선 압도적인 매력을 갖춘 책이었다. 현재까지 반 이상 읽었다는 점이 이걸 증명한다. 일주일 정도 투자해서 천천히 읽긴 했는데, 다른 책 읽는 것에 정신이 나가서 어느 순간 계속 책 읽는게 힘들다고 느꼈다. 두꺼운 책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건 보통 그런 식이다. 

두꺼운 책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어려운 책 읽는 것이다. “어려운 책”이라는 개념은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다. 번역이 엉망이라 어려운 책일 수도 있겠고, 내용이 생경해서 어려운 책일 수도 있고, 혹은 전문적인 배경지식이나 개념들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난 주관적인 어떤 기준을 세워야 겠다. 일반적으로 다른 책을 읽는 것의 1/2 혹은 1/3 정도밖에 읽는 속도가 안 나가는 책을 난 어려운 책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내 경우엔 오후 1시 쯤 카페에 앉아서 집중해서 소설을 읽으면 보통 1시간에 100페이지 정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조건에 30페이지 혹은 50페이지 정도 밖에 읽지 못할 것 같은 책을 어려운 책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어려운 책의 범주에 속하는 책 역시 읽다 멈춘 것이 많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책이 여기에 속한다. 솔직히 말해서 책 좀 좋아한다고 하면 누구나 읽었다고 말하는 ‘죄와 벌’을 아직도 완독 못한게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뭔지 모르게 ‘죄와 벌’ 정도는 이미 완독해야 책을 좋아한다고 어디 가서 말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죄와 벌’은 어렵다기 보다는 재미가 없다. 이미 여기저기서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 줄거리는 다 아는데, 막상 읽으려고 하니 흥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읽자, 나중에 읽자 미뤄두다보니 지금까지도 안 읽은 상황에 처한 것이다. 

사실 대학생 땐 두꺼운 책, 어려운 책 가리지 않고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당시엔 책 읽는 걸 ‘간지’(멋)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기본도 없는 상태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들을 많이도 읽었다. 그 때 읽었던 가장 어려운 책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라는 책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책이었다. 그 당시엔 나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책들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독서가라고 콧대 높이며 지하철을 전전했던 내 스스로를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으악. 


Posted by 스케치*
독서/미분류2017. 8. 2. 23:40

저자 : 이정원
출판사 : (주)웅진씽크빅 
초판 1쇄 발행 : 2010년 11월 1일 

1. 고전 소설 다시 읽기
학창 시절에 정말 많은 우리 고전소설을 읽었다. 심청전, 홍길동전, 장끼전, 토끼전, 양반전 등등. 머리가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문학이란 이름으로 이런 책들을 읽고 공부했다. 수능 언어영역에서 만점을 받기 위해서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전 읽는데에 소모했던가?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내게 시험 이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문제집 해설지가 말해주는 ‘책의 주제’가 아니라, 내가 진실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읽으면서 느꼈던 나만의 감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때도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 같은 것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것이 ‘권선징악’이라던가 ‘충효’의 개념을 벗어나는 정도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건 단지 정답을 찾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떤 비판적 시선 혹은 수용적 시선으로 소설을 보지 못했다.

고전소설의 주제가 ‘권선징악’이라니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 논리를 따르자면, 기껏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열여섯 살짜리 소녀가 몸을 던지는 것이 ‘선’이란 것이다. 고전소설에서 도덕에 대한 이해는 그토록 얄팍하단 말인가? <심청전>이 마음에 안 든다면 <춘향전>을 보라. 사랑을 위해 정조를 지키는 여성을 구원하는 것이 결국은 ‘암행어사’라는 판타지엿다니,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춘향의 사랑이라는  게 ‘구원의 대상’일 뿐이며 그것의 궁극적인 근거 또한 ‘정조’라는 봉건적인 규범에 있다면 <춘향전>은 정말 밥맛없는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을 범하다’는 기존에 우리가 정답 해설지에서 얄팍하게 알고 있던 어떤 정답 같은 해석을 깨트린다. 너무나 당연하게 바라보던 소설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깨트리고, 그 소설이 쓰여지기까지의 현실과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살고 있던 조선 시대의 현실을 파헤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고전의 의미를 찾는다.

우리의 현실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도서관에 꽂힌 그 많은 책들은 그냥 ‘옛날’ 소설일 뿐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것이 고전이 되려면 <홍길동전>에서, <김원전>에서, <장화홍련전>에서 내가 미처 몰랐거나 지금 느끼고 있는 차별의 아픔, 성숙의 황홀함, 이기적인 환상들을 다시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 책은 13종의 고전 소설을 파헤치며, 그러한 우리만의 우리 고전이 영국의 셰익스피어 소설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떤 현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책에서 파헤쳐진 그런 고전들의 현대적 의미는 어떤 면에선 너무나 포스트모던적이어서 예상을 뛰어넘는 매력을 부여한다. 

‘전을 범하다’를 다 읽은 후, 고전이라던가 짧은 설화나 우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은 바뀐 것 같다. 내가 지루하다고 느끼거나 뻔하다고 느끼던 것이, 약간의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도 혹은 약간의 보충설명을 들었을 뿐인데도 크게 탈바꿈해버렸다. 

2. ‘전을 범하다' 3줄 평 
- 교과서에서 배운 이후 다시 보지 않던 우리 고전을 다시 읽고 생각해볼 수 있다. 
- 학창시절엔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의식을 파헤치는 재미가 쏠쏠하다. 
- 내가 만일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아이가 있다면, 꼭 읽도록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7. 8. 1. 22:12
한국 맥주 시장에 대한 헛된 상상 
한국 맥주가 맛없다는 인식이 생겼다. 20대에만 머물던 이 인식은 차츰 30대를 잠식했고, 40대로 넘어서기 시작했다. 한국 맥주회사들은 그들 특유의 독점력을 바탕으로 해외 맥주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을 중심으로 해외맥주는 차츰차츰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미국 맥주와 일본 맥주가 그 시작이었다. 독일 맥주와 벨기에 맥주가 들어서더니만, 스페인 맥주와 마이너한 종류의 일본, 미국 맥주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편의점 한 곳에서 고를 수 있는 해외 맥주만 해도 이미 너무 많은 칸을 차지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 이상으로 편의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 다른 술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빼앗거나 탄산음료가 있던 자리에 맥주만 가득 차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국내 맥주 회사들은 혼술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광고를 만들었다. 그게 아마 1~2년 쯤 전의 일이다. 그런 광고를 비웃듯 혼술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친구나 회사사람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비율을 줄어만 간다. 

앞으로 우리나라 맥주시장은 어떻게 될까. 

여기서부터는 순수하게 나의 상상이다. 

해외 맥주가 넘쳐나는 문제가 공론화되고, 일부 대기업에서 맥주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반발할 것이다. 이미 대기업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맥주 중견 업체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런 회사들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고, 국가에서도 기존의 독과점을 풀고 중견 업체가 맥주를 유통할 수 있는 시장으로 활성화시킬 것이다. 전통적 유통업계는 맥주 회사와 강한 결착을 보이고 있었지만, 중견 업체 맥주들은 기존의 유통업계를 벗어나 교묘한 신시장을 통해 시장에 침투할 것이다. 

제품의 혁신보다 더 무서운 건 플랫폼(유통망)의 혁신이다. 맥주가 구매될 수 있는 새로운 신시장이 열릴 것이고, 이 시장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전까지는 맥주를 구입하려면 대형마트, 편의점 같은 곳에 가야했지만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맥주가 판매되는 곳은 일반적인 술집일 수도 있고, 혹은 치킨을 판매하는 치킨집일지도 모른다. 단, 기존엔 그런 곳에서 판매되던 것이 이름없는 생맥주였다면, 앞으론 온라인 세상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중견 브랜드가 위치할 것이다. 당연히 소비자들은 선택권이 넘쳐날 것이다. 온라인 어플을 통해 어떤 음식점(혹은 치킨집)에서 어떤 종류의 중견 맥주 브랜드가 판매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기존의 법 규제에 따르면 치킨집 같은 곳에서 생맥주를 판매하는 것도 불법이라고 한다. 서민 사업자를 위해서 과하게 제재를 못하는 불법의 사각지대에서 새로운 시장이 성장하다보니, 대기업에서도 과하게 제재하지 못한 자리에 중견기업들과 모바일 기술이 결합된다. 

아마 힘든 일이겠죠? 맥주 시장에서 뭔가 넷플릭스라던가, 우버같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써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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