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미분류2017. 8. 10. 23:31

저자 : 스테파노 만쿠소, 알레산드라 비올라 / 옮긴이 : 양병찬 
출판사 : (주)행성비
초판 1쇄 발행 : 2016년 5월 16일 
전자책 발행 : 2017년 6월 15일

1. 식물을 생각하며 
우리 집엔 베란다가 따로 없다. 집집마다 그 흔한 난도 없고, 기르기 쉽다는 선인장 하나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잘 때까지 내 사방 몇 미터 사이엔 풀 한포기 없는 현실이다. 창문을 연다. 앞 집 건물이 눈 앞에 들어온다. 차라리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면 어떤 전망 같은 게 있었을 수도 있다. 빌라에 살면, 그것도 서울에 있는 빌라에 살면 가장 안 좋은 것은 집 주변에 나무는 커녕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이 집에 이사왔을 당시엔 비슷한 게 있었다. 빌라 앞에는 팔 한뼘 정도 너비로 빌라를 둘러싸고 화단 비슷한 것이 있었다. 4년인가 5년 전쯤에 그마저 없어졌다. 빌라 조경에 관심이 많은 아저씨(아마도 빌라 건물주가 아닐까)에 의해서 그 공간은 초록색을 닮은 인공잔디로 덮혔고, 집 근처에선 풀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다보면 도시의 풍경 속에 살다보니 풀을 보기가 참 힘들다. 평소에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그 안에 화단이 있다는 게 말이 안되지 않은가. 출퇴근 하려는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에 채워져 있듯이 꽉꽉 눌리는데 어떻게 그 안에 여분의 공간을 만들어서 화단을 만들까. 아니, 애초에 달리는 지하철 안에 화단이 있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회사 근처에도 풀은 거의 없다. 가로수가 있긴 있는데, 솔직히 그 나무들이 풀이라던가 식물이라던가 하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건 어딘지 모르게 거무튀튀한 갈색과 검청색 잎으로 이뤄진 사물의 느낌을 주는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내 주변에서 철저히 식물을 제압하고, 그것을 없애두며 살아가다 보니, 이 책에서 말해주듯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이오매스 중 99%가 넘는 개체가 식물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된다. 식물을 완전히 배제하며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다보니, 식물이란 존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그건 배제해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점심식사로 김치가 나오고, 샐러드가 나오고, 콩나물이 나와도 그건 그냥 만들어진 음식이다. 나는 그걸 보면서 ‘아, 식물을 먹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건 칼로리가 얼마고, 소화는 잘되는 음식이고, 맛있는 음식이고’ 정도만 생각한다. 

적어도 고기를 먹을 땐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해봤다. 돼지고기라던가, 소고기라던가 하는 음식을 먹을 땐 가끔 방송에서 보았던 돼지나 소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영화로 보았던 ‘옥자’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내 앞에 있는 이 음식을 먹기 위해서 희생해준 동물들을 떠올리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 적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쩌다 한 번 그런 생각을 한다. 매일 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면 당장 채식주의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근데, 여기서 내가 ‘채식주의’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우습다. 왜 동물을 먹는 것에는 마음의 부담감을 느낄 수 있으면서 식물을 먹는 것에는 마음의 부담감을 느낄 수 없는가? 인류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되고 지적인 종교 중 하나인 불교에서도 육식의 대체제로 채식을 내세운다. 사실 이 말은 철저히 동물중심적 사고관이다. 동물의 몸을 희생하는 것은 안타깝게 여기면서, 식물의 몸을 희생하는 것에는 아무런 위화감을 못느끼는 것일까? 

이 책 전체에선 왜 우리가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왜 동물과 식물을 따로 놓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생물학이라고 했을 때 왜 동물은 더 우월하고, 식물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탐구한다. 은연 중에 나의 가장 은밀한 사고관을 지배하고 있던 동물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를 파헤쳐볼 기회를 제공한다. 

책 전체에선 우리가 흔히 갖고 있을 법한 오해들을 풀어나가는 것에 온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 식물이 살아있는 생물이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감을 느끼고, 어떤 사고와 판단을 하며, 성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파헤친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을 때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식물에 대해 갖고있는 사고관을 완전히 동물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정말 내 생각은 심층부터 바뀔 수 있겠구나. 나의 식습관이나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 여행지에서의 감각, 또는 나의 오감에 대한 판단까지도.’ 

2. ‘매혹하는 식물의 뇌’에서 인상깊은 구절 
노아가 신의 명령에 따라 정결한 짐승과 새는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방주에 넣은 덕분에 대홍수가 끝난 후 종족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는 식물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략) 
독자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겠지마 이렇듯 구약성서 전반에는 ‘식물은 살아있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창세기의 기자는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생명과 부활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식물의 전반적인 중요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초식동물과 식물 간의 생존을 건 전쟁은 무려 4억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초식동물 중에서 식물에게 가장 중요한 그룹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곤충이다. 곤충들에게 있어서 식물은 지상낙원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다양한 서식지와 생태적 틈새를 발견하며, 풍부한 식량도 얻는다. 식물과 곤충 간의 끊임없는 갈등은 양쪽 모두에게 엄청난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형질을 결정함과 동시에 시간적, 공간적 분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물을 미식가와 비교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식물의 뿌리는 땅속 몇 세제곱미터 범위 안에 존재하는 극미량의 무기염류를 찾아낼 수 있다. 기껏해야 요리 한 접시 속에 들어 있는 식재료 몇 가지를 감지해내는 미식가와는 급이 다르다. 

모든 식물들은 커다란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기공을 열면 광합성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포도당을 얻을 수 있지만 많은 수분을 잃게 된다. 반대로 기공을 닫으면 수분을 유지할 수 있지만 광합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여서 식물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집단역학, 창발적 분산컴퓨팅과 같은 개념들이 제안되었다. 이런 고차원적 개념들을 식물에게 적용하는 것은 일견 어불성설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식물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분명하다. (후략) 

3. '매혹하는 식물의 뇌' 3줄 평 
- 평소 동물 중심적,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하던 습관을 되새김질 하게 하는 책 
- 생물관에 관해서는 이 책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내가 가볍게 지나가던 식물의 특성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 수 있는 책이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