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8. 6. 23:37
앙드레 케르테츠전을 보고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 성곡미술관에 가서 ‘앙드레 케르테츠 전’을 보고 왔다. 전시회에선 앙드레 케르테츠의 일상을 크게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20대의 사진을 모아둔 헝가리 시절, 30대의 사진을 모아둔 파리 시절, 40대 중반 이후부터 노년까지를 모아둔 뉴욕 시절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적어두자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진은 노년에 찍은 두 점의 작품이었다. 사진 작품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약 10여 년의 차이를 두고 거의 비슷한 구도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흑백 사진으로 된 사진은 겨울에 찍은 사진이었고, 컬러 사진으로 된 사진은 여름에 찍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색깔의 차이가 선명하게 다가왔는데, 사진 속 세세히 배치된 물건들의 형태가 꽤 마음에 들었다. 흑백 사진은 나무의 형태가 더 잘 드러났고, 컬러 사진에는 나무 형태가 생략되면서 건물 옥상에 있는 사물들을 더 많이 담았다. 


시기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때는 1912년에서 20년 사이에 헝가리에서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케르테츠가 10대에서 20대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별로라고 느낀 것이 30대 시절의 파리에서의 사진들, 그리고 그가 아꼈던 왜곡 시리즈인데 케르테츠의 황금기가 그 즈음이었다고 하니, 나의 감상은 정반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케르테츠의 20대 시절 사진들에는 그의 동생 예뇌가 자주 등장한다. 케르테츠가 찍은 가장 아름다운 사진 중 하나로 “The Dancing Faun(1919)”이란 작품이 있는데, 이 역시 예뇌를 찍은 것이다. 벌거벗은 남자가 수풀 한 가운데에서 엘프처럼 뛰노는 모습은 어딘지 현실적인 면을 벗어던지고, 판타지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가장 중심지에 있던 헝가리에서 찍힌 사진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어딘지 마음이 더 와닿았다. 

팜플렛을 보니,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 작가라 적혀 있었다. 사진작가라던가, 사진 예술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보니 이 설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다만, 한 세기를 대표할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진 작가가 정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뉴욕에서는 꽤 소외받은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는 설명에 놀랐다. 이 설명 덕분에 그가 찍은 뉴욕의 시가지는 외롭기 짝이 없다. 전세계에서 가장 활달한 뉴욕 모습은 너무나 쓸쓸한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며 뉴욕의 풍경을 그렸던 호퍼라는 화가가 떠올랐다. 호퍼가 그렸던 Nightwaks(1942)라는 작품이 비슷한 느낌이었다. 출구없는 공간, 개인은 외롭고, 도시는 정돈되었으며, 고독함이 극대화된 모습이다. 

20대 시절 그가 찍었던 활달한 헝가리의 일상을 떠올리며 80대의 케르테츠가 느꼈던 감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상상하는 기분이 묘했다. 

미술관 밖은 후덥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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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시, 에세이2017. 8. 5. 21:00

저자 : 율라 비스 / 옮긴이 : 김명남
출판사 : (주)열린책들
초판 1쇄 발행 : 2016년 11월 25일 
전자책 발행 : 2016년 12월 16일 

1. ‘면역에 관하여’를 보며 주로 느꼈던 생각들 
이 책은 면역과 관련된 주제로 총 30편의 에세이를 모은 에세이집이다. 다만 이 에세이를 저술한 율라 비스는 의학계에서 일하는 의사나 연구자가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이자 미국의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면역에 관하여’에 실린 13번 째 에세이 ‘여성 치료사와 비난받는 엄마들’은 수 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만 공부하고 인체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 실패해왔던 공적인 의사집단에 대항하는 어머니 집단, 여성 치료사를 소개한다. 그 에세이에 따르면 실제 오랜 인류의 세월 동안 가족의 생명을 책임지고, 경험으로서 생존의 첨단에 서 있던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물론 그 에세이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관점으로 중립적인 결론을 내는 것에 성공하지만, 사실 내가 느낀 건 율라 비스라는 저자가 바로 그 어머니 집단에 속한 똑똑한 저널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었다. 

율라 비스의 30편의 글들은 지적으로 충만한 사료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한 자신의 경험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아이를 기르며 배우고 느꼈던 것들이 생활 수준을 넘어서서 오랜 역사와 시적인 은유를 넘나든다. 일례로 율라 비스가 아이와 함께 헌혈을 할 때, 그는 그 행동이 자신의 뱀파이어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거라 여긴다. 이런 종류의 은유가 미국인이라서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책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생각은 개인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에 대항한 인간 공동체의 회복, 혹은 인간을 넘어서 자연 전체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한 지향이다. 면역이란 주제로 이런 고민을 붙여나갈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자기 몸의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을 장 속에 품고 있다.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2. 그 외 인상 깊은 문구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인 것 못지않게 이 문제, 즉 증거와 진실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진실이 다른 진실을 탈선시킬 수 있다고 암시하면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는 아직도 백신 접종이 질병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라고 믿는 걸까? 

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것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덕분이다. 
(중략)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게 위안일 때, 대체 의학이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강장제는 천연natural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인간의 한계에 좌우되지 않는 의학, 전적으로 자연이나 신이나 그도 아니면 지적 설계에 의해 마련된 의학을 암시한다. 자연이라는 단어는 의학의 맥락에서 순수함, 안전함, 무해함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을 좋음의 동의어로 쓰는 태도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심하게 괴리된 결과인 게 거의 분명하다. 

3. ‘면역에 관하여' 3줄 평 
- 어떤 주제(교육, 의학, IT, 역사, 기타 등등)를 갖고 쓴 에세이집 중, 가장 단단한 책이 아닌가 싶다.  
- 이 책은 면역이라는 어떤 과학, 이론,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을 말하고 있다. 
- 면역을 둘러싼 풍부한 은유와 사고의 역사에 놀랐다. 다만, 한국인의 시야에선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스케치*
독서/시, 에세이2017. 8. 4. 23:38
한 사람에게 
너의 속내에 자리한 아픔이 자라나
내가 겪고 있는 아픔보다 더 깊어진다면 
나는 지금 자리 정리하고 일어나 
네 곁으로 달려가야 하리라 
비록 일상의 모든 끈끈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느낌뿐일지라도 

작은 것을 아끼는 부드러운 마음과 
작은 것은 버리는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너는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가 
나누어 짐 지면 살림살이의 무게는 
얼마만큼 더 가벼워지는지
너는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가

내 속내에 자리한 아픔이 자라나 
네가 겪고 있는 아픔보다 깊어진다 해도 
너는 지금 자리 정리하고 일어나 
내 곁으로 달려오지 않아도 좋다
비록 일상의 모든 끈끈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일지라도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면? 

이승하 시인의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에서 발췌.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