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8. 8. 23:37
시간과 공간의 방 
만화책 ‘드래곤볼’을 보면 시간과 공간의 방이라는 것이 있다. 그 방에 들어가면 바깥에서는 하루가 소요되지만, 그 방 안에선 1년의 시간이 흐른다. 

만화 주인공들은 자주 그 방에 들어가서 무공훈련을 익혔고, 강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지구에 어떤 강력한 적이 등장해서, 당장 내일 모레 지구가 멸망할 위기가 닥쳤다면 시간과 공간의 방만큼 유용한 곳이 없을 것이다. 다른 일은 다 내팽겨쳐서라도 그곳에 가서 빨리 적을 무찌를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1년을 더 무공 수행을 하면, 그만큼 더 무공은 강해질 거라는 발상이다.

그런 방이 나에게도 쓸모가 있을까? 만화 주인공들은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1년 간 나이 먹으면서 수련을 할 필요가 있겠지만, 내 입장에선 괜히 그런 곳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봤자 혼자서 나이만 먹는다. 게다가 그곳에선 인터넷도 연결 안될테니 그 흔한 인터넷 서핑도 어렵고, 전자책 한 권 다운받아 보기도 힘들다. 게다가 시간과 공간의 방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설정을 살펴보면 그 방은 거대한 흰색 방 그 자체이다. 바깥 세계와 연결된 문이 있는 곳에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몇 가지 가전도구(?)와 침구들을 제외하면 허여멀건 흰색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 그 어떤 정신병원도 그보다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사실 고3 땐 내내 그 방이 집 앞에 있길 희망했다.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공부 좀 하겠다는 친구들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선행학습을 시작해서 한창 공부를 진행했는데, 내 경우엔 고1 2학기 말이 되어서 뒤늦게 공부에 집중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 때문에 학교 체육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종일 책상에서 공부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내 옆 짝궁이던 친구가 내게 이런 얘길 하기도 했다. 

‘넌 정말 공부를 잘 하는 것 같아. 아, 여기서 ‘잘’이란 말의 용례는 ‘우수하다’라는 뜻이 아냐. ‘자주’한다는 뜻이지. 뭔 말인진 알지?’ 

고2, 고3 시간이 흐를 때마다 수능 모의고사 점수가 시간과 비례해서 올라가는 게 눈에 보였다. 수능을 코 앞에 둔 시점에 난 내가 이뤄놓은 성취가 내가 원하던 대학을 갈 정도가 아니라는 것에 좌절했고, 수능에서 운을 바랐지만 시험은 결국 내 실력과 비슷하게 나왔다. 이 때문에 아버지께 재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내게 그 정도의 비용을 투자하는 것을 거부하셨고, 결국 당시 합격했던 대학에 들어갔다. 

사실 요즘도 시간과 공간의 방이 떠오르긴 하는데,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그 방에 들어가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인터넷 같은 거 연결 안되도 상관 없으니까, 좋아하는 책이나 잔뜩 들고 가서 여유롭게 읽으면서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권태로우면 책이나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여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아침 출근하기 직전에 그 방에 들어가서 모자란 아침잠을 채우고 여유롭게 출근하는 건 어떨까.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피땀흘린 수련을 하기 위한 공간이 고작 그딴 이유로 사용된다고 분노할 수 있겠지만,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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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