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7. 8. 24. 23:57
내 존재의 빈 감방
내 존재의 빈 감방 
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
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 
바람으로 구름으로 통하는 감방이에요 
그런데도 감방은 감방이로군요 

내 존재의 빈 감방
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 
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 

(바라미 구르미 멍청히 흘러간다) 

-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 중 - 

가둬짐에 관하여
친구들과 방탈출 게임을 가끔 하러 간다. 갇혀 있는 공간에서 다들 필사적으로 힌트를 찾는다. 밀폐된 공간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들 여유가 넘치긴 한다. 방탈출을 하러 갔을 때 밀폐된 공간이 갖고 있는 어떤 형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벽 한 쪽 면에는 60분이 줄어드는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바깥에 있는 데스크와 연결할 수 있는 인터폰도 있다. 게임을 하다가 정말 화장실이 급하다 할 경우엔 인터폰으로 요청해서 그 길로 바로 탈출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혹은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마구 부숴서 움직이면 사실 그 안에 숨겨진 여러 힌트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 물건은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타서인지 금새 부숴질 것처럼 허약하다. 나무로 된 상자는 바닥으로 던지는 즉시 깨질 기색이다. 친구들의 얼굴을 봐도 다들 즐거워 보인다. 인위적이기 짝이 없는 힌트를 찾고 나면, 그걸 맞춰나가는 재미에 푹 빠진다. 사실 1시간 안에 탈출하는 게 목적이라, 1시간을 넘기면 무조건 탈출한다. 목표는 그보다 짧은 시간 안에 탈출하는 것이다. 

갇혀 있는 공간이란 건 대개 그런 식이다. 굳이 방탈출이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우리가 '나 어딘가에 갇혀있다'라고 말하는 공간은 사실 누군가가 가둬둔 것이라기보단 내 스스로가 사회적인 규약에 맞춰서 가둬지는 것에 협력하는 것이 맞다. 회사가 싫으면 회사를 떠나면 되고, 학교가 싫으면 학교를 떠나면 되며, 나라가 싫으면 나라를 떠나면 된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상당히 귀찮고 힘든 일들을 뒤이어 나을 지라도 말이다.

정말 흉악스러운 범죄를 저질러서 '실물' 감옥에 갇히는 일이 아니라면, 모든 감옥에는 다 틈새가 있다. 이런 틈새를 메우는 것은 윤리라는 이름일 수도 있고, 혹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일 수도 있다. 혹은 귀찮음이라던가, 육체적 정신적 고통 때문일 수도 있다. 

외부적 감옥이 아니라, 내부적 감옥은 어떨까. 사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도 비슷하다. 내 스스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우고 있는 정신적인 감옥은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며, 그 감옥 안에서 규율을 따르고 있는 나 자신도 얼마든지 감옥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틈새가 있다. 생각보다 그 틈새는 넓고 깊다. 강박증적인 성격만 아니라면 더더욱이나 그 틈새는 넓겠지.
 

사실 애초에 내가 감옥에 가둬진다는 관념이 우습긴 하다. 애초에 나를 가둔 것은 누구이고, 가둬진 것은 또 누구인가? 이 둘이 모두 나라는 존재라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둘로 쪼개서 생각하는 것이 맞긴 하는 걸까?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