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5. 5. 23:54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2017년 5월 5일의 편지
지금 우울하니? 네가 우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가끔은 한없는 우울함에 정신이 눅진해질 때가 있어. 가을, 겨울 쯤이 특히 그렇지. 시간대로 따지면 오후 4시 쯤? 물론 가장 증세가 심할 때는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야. 그 시간이 되면 난 책상 앞에 앉아 혹은 침대에 누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나 자신과 비교하고 평가하지. 난 왜 그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난 왜 그 사람처럼 좋은 친구가 없을까. 난 왜 그 사람처럼 일을 못할까. 난 왜 그 사람처럼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걸까. 

한 편으론 알아. 그 사람도 어디선가 고민하고 있을테고, 그 사람도 남들에게 없는 큰 단점이 있을테고, 그 사람도 새벽 내내 잠 못이루며 고통스러워 한다는 걸. 

그럼에도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땐 이런 '안다'는 사실들이 전부 허풍이나 거짓처럼 느껴지지. 그리고 자책하지. '그 사람은 불행하지 않아. 불행한 건 나야. 내가 문제야. 난 왜 이 문제를 고치지 못하는 걸까. 아마 영원히 못 고칠거야. 이 문제는 모두 내 탓이야. 내 탓이야.'라고.

나도 성당에 꽤 오래 다녔거든. 모태신앙이야. 성당에 다니는 건 꽤 유익한 일이긴 했는데, 그럼에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기도문이 하나 있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모두가 내 큰 탓이로소이다." 

매주 주말 미사를 드리면서 이 기도문을 입속에서 올공거렸지. 어린 내겐 좌우명처럼 자리잡았어. 그래서일까, 난 주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일들이 다 내 탓이라고 삭혀 왔어. 친구 잘못도 내 탓, 부모님 실수도 내 탓, 남들이 잘되고 내가 못난 건 그저 다 내 탓이라며.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잘못됐어. 왜 당당하게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얘기하지 못하는 걸까. 명백히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에 대해 '네 잘못이다'라고 얘기하지 못하는걸까. 왜 나는 항상 패자의 입장에서 자책하고 힘들어 했던 걸까.

모든 걸 남탓하는 것 역시 잘못된 방식이긴 하지만, 모든 걸 내 탓인양 자책하고 우울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당당한 자세로 자신을 보듬어주는 마음. 혼자 있는 저녁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 난 그런 이기심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잡문 > 기타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것에 관하여  (0) 2017.05.08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휴일의 평화  (0) 2017.05.07
고등어  (2) 2017.05.03
코골이 범인은?  (0) 2017.05.01
사랑니  (0) 2017.04.26
Posted by 스케치*
독서/미분류2017. 5. 4. 23:28

저자 : 최장순
출판사 : 틈새책방
초판 1쇄 발행 : 2017년 1월 2일 
전자책 발행 : 2017년 1월 19일 

1. 스스로를 반성하며
나는 미국 시장을 담당하는 B2B 해외 마케터다. 대학생 때부터 해외 마케터를 꿈꿨지만 마케터로서 내가 자격이 되는지, 내가 하는 일이 마케팅이 맞는지 되뇌일 때마다 부끄러울 뿐이다. 

대학생 때는 모든 마케터란 자고로 IMC(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를 구축해서 고객을 위한 마케팅을 기획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컨셉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만들어 홍보하는 것. 그런 것이 마케팅이라 생각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서 B2B 회사에서, 특히 해외를 상대로 통합 마케팅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Apple처럼 시장을 휘어잡는 단 하나의 제품으로 승부하는 건 엄청난 리스크를 가져가야 했다. 시장은 통합되지 않고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었다. 모든 시장마다 각자가 원하는 사양이 달랐다. 고객들은 항상 자신들에게 딱 맞는 스펙을 원했다. 각 시장의 마케터들은 시장 별로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각자 다른 제품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회사 내에는 스펙이 조금씩 다른 수백 종의 제품이 생겨났다. 물론 그로 인해 비용은 증가했다.  

정작 고객도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고객은 끊임없이 사양을 바꿔서 '이런 제품은 어때?'라고 물어보았다. 제대로 된 마케터라면 본질적으로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객에 대해서 질문해야 맞다. 하지만 난 고객을 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객은 해외에 있는 영업사원들이 마주하고, 나는 그 영업사원들이 요청한 대로 제안서를 준비하는 것이 전부였다. 고객에게 찾아가서 '네가 진짜 원하는 진짜 제품은 이런 거야.'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해외 마케팅이란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고객을 만나고 싶어도 고객은 비행기를 타고 200만원의 항공권을 끊어야 만날 수 있었다. 실제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인터넷으로 구글링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운 좋게 미국으로 출장을 가더라도, 행사장과 호텔방 그리고 아웃렛을 들르는 것이 전부였다. 

이 책 '본질의 발견'은 물론 B2B 마케터를 위해 작성된 책은 아닐 것이다. B2C 마케팅 사례가 전부니까. 

하지만 고객에게 다가가 그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본질'은 같다. BEAT라는 작가만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지만, 본질은 2500 년 전, 손자병법에서 손무가 말했던 것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 '지피지기요, 백전불태라.' 나(회사)를 알고, 적(고객)을 알면 고객이 원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저자가 소개하는 BEAT 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  

명명백백하지만, 정말 실천하기 어렵다. 실제 제품을 기획하거나 마케팅을 기획할 땐 고객에 대해서 고민해보기보다는 일단 우리 회사의 형편을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혹은 고객이 원하는 걸 기획하기보다는 기획하는 내 자신이 원하는 걸 기획하는 경우가 넘쳐난다. 그 결과는? 뻔하다. 고객이 원하는 건 완전히 다른 거니까. 

이 책에선 BEAT 이론에 충실하여 정석적으로 접근한 성공 사례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읽다보면, 이게 진짜배기구나. 감탄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이런 방법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비추어보면서 부끄러움과 반성을 하게 된다. 

2. '본질의 발견' 도식으로 정리해보기 


3. '본질의 발견' 3줄 평 
- 기획에서 Concept 짜는 것의 중요성이 잘 설명되어 있다. 
- BEAT라는 이론으로 Concept을 짜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한다. 
- 실제 현업 사례에서 BEAT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7. 5. 3. 23:48


고등어
고등어는 좋아하는 생선이긴 한데, 흔히 먹지 않는 생선이다. 아버지 따라 횟집에 갈 때 스키다시로 나오는 고등어구이가 살면서 먹은 고등어의 95%를 차지한다. 고등어는 날씬하고 길쭉한 모양이 포인트다. 기다란 몸통을 따라 뼈를 발라 먹는 게 제 맛이다. 어릴 적엔 뼈에 달라붙은 살점 하나 남기는 게 죄악 같아서 빠짐없이 발라 먹곤 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줄곧 내륙에 살았지만, 중학교 때까진 바닷가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횟집에 자주 갔었다. 김치찌개에 고등어를 넣어서 먹는 집도 있겠지만, 우리 집에선 주로 꽁치를 넣어서 먹었다. 꽁치 김치찌개를 먹던 것도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고교시절 이후론 김치찌개에서 돼지 목살이 대체된 적이 없었다. (김치만 나온 적은 있긴 하지만.) 대학교 때 서울에 올라오고 나니, 서울에선 돼지가 아닌 김치찌개 파는 곳이 드물었다. 대학 근처 김치찌개 집 두 곳에서도 모두 돼지를 넣어서 팔았다. 

고등어 회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맛봤다. 당시 성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청년회 사람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 정선, 태백을 둘러보는 여행을 갔었다. 그때 처음 맛봤다. 그 전까진 노량진에서 파는 광어, 우럭이 회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고등어회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동해에서 잡힌 고등어회는 서울까지 옮겨오기 어려워서 서울 사람은 먹어보기 어려웠을 거라는 설명을 들었다. 당시 서울에선 그런 음식을 접해본 적 없었으니, 그 설명은 그럴싸했다. 

서울에서 고등어보다 더 보기 힘든 생선은 아마 청어일 것이다. 살면서 청어를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청어를 좋아해서 이 생선을 주제로 수필을 썼다. 그 글을 읽으면서도 그 생선이 대체 뭔 맛일까, 아마 고등어 맛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고등어나 청어나 둘 다 등 푸른 생선이니 그게 그거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고등어'를 찾아보면 비슷한 말로 청어(鯖魚)라고 나온다. 여기서 청어(鯖魚)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먹은 청어(靑魚)와 다르다. 청어(靑魚)란 본디 등푸른 물고기를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등푸른 물고기의 대명사가 고등어가 아니라 청어(靑魚)였으니, 예전엔 고등어가 흔치 않았나 보다. 

흥미롭게도 고등어를 지칭하는 청어(鯖魚)의 청(鯖)자가 '청어 청'이라는 뜻이다. 고등어와 청어는 엄연히 다른 물고기인데 한자에선 마치 같은 물고기인 양 설명된다. 우리 선조들도 청어와 고등어가 여간 헷갈리긴 했던 것 같다. 

이렇게 고등어 글을 쓰다 보니 근처 횟집에 가서 스키다시로 구워진 고등어만 하나 얻어와서 먹고 싶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한 잔 사와서 구운 고등어랑 먹으면 제맛이겠지. 물론 고등어는 9월에서 11월이 제철인 가을 물고기라고 하니 제대로 맛보려면 아직 4개월은 지나야 한다. 

옛 말에 '가을 배와 고등어는 맛이 좋아 며느리에게 주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전어구이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라고 하는데, 가을철 어지간히도 며느리에게 생선을 안 챙겨줬나 보다.


'잡문 > 기타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휴일의 평화  (0) 2017.05.07
2017년 5월 5일의 편지  (0) 2017.05.05
코골이 범인은?  (0) 2017.05.01
사랑니  (0) 2017.04.26
2016년 9월 30일의 편지  (0) 2017.04.24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