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4. 24. 23:44
2016년 9월 30일의 편지 
벌써 9월이 끝나서 가을의 초입이라는 말도 조용히 식어가고 있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 소매도 적당히 걷고, 인중에 땀도 쓱 닦고, 모니터 옆 선풍기를 끄면, 뒤쪽에 앉아 있던 차장님이 말씀하셔. - 밥 먹으러 가자. - 사무실 문을 지나, 다시 유리로 된 자동문을 지나면, 화장실 옆에 검은 엘리베이터 문이 3개 있어. 사람들은 11시 40분부터 엘리베이터 앞 공간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며 밥 먹으러 갈 마음의 준비를 해. - 오늘은 뭘 먹을까? - - 지하식당? 중국집 아니면 얼큰한 찌개? - 검은 구조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회사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면, 회사 건너편 건물 1층에 ‘10월 OPEN’이라고 빨갛게 쓰여 있는 브런치 카페의 공사현장이 눈앞에 들어와. 요즘 강남의 인테리어 공사현장들이 다들 그렇듯, 유리 벽 밖에는 나무판자를 대놓고, 그 앞에 적당한 광고 문구들을 붙여놓고 있어. 분당 아주머니들을 겨냥한 브런치 요리들이 사진과 함께 붙어있지. 
아저씨들은 지나가면서 한마디 씩 하곤 했어. 어제 했던 얘길 오늘도 또 했던 거야.  

“망하겠네.“ 
“그러게, 얼마나 갈까? 6개월?“ “아뇨. 전 3개월 정도 예상해요.“ 

조용히 따라가면서 브런치 요리들 옆에 선보인 빙수 이미지들도 보여. 

‘녹차 실 빙수‘ ‘허니 밀크티 실 빙수‘ ‘달콤 카라멜 실 빙수'

그러다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오늘 날씨가 몇 도였나 살펴보았어. 오후 11시 50분, 날씨는 21도쯤이었던 것 같아. 내일이 되면 이제 10월이야. 오늘 날씨랑 1주일 뒤 날씨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예보를 보면서, 내가 이 브런치 가게에 오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어. 

지난번 이곳에 있던 가게는 횟집이었어. 불과 3개월 전, 여긴 장어집이었어. 불과 9개월 전, 여긴 일식집이었어. 불과 1년 6개월 전, 여긴 파스타 집이었어. 바로 이곳. 우리 회사 건물 바로 옆, 그리고 지하철역에서는 겨우 3분 거리. 아줌마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지만, 미묘하게 이쪽 거리는 아저씨들의 유동인구가 많은 간호대학 속 남학생 같은 골목이야. 점심만 되면 떼를 지어 아저씨들이 흘러나오고, 10시 오전이나 3시 오후 같은 애매한 시간에도 꽉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아저씨들이 흘러나오는 곳이야. 그래서 이곳에서 장사하려는 아저씨들은 생각한 거지. '그래, 여기에 아저씨를 위한 장소를 만들어야겠어.' 그리고 망했어. '그리고 다시 생각해본 거지. 그럼 아줌마를 위한 장소를 만들면 되나?' 그리고 또 망했어. 

우리 집 앞에도 그런 곳이 있었어. 내가 벌써 10년간 봐왔던 공간인데, 원래 여기가 빨간 간판이 있던 곳인지, 초록색 간판이 있던 곳인지 잘 기억나지 않아. 2005년 겨울에도 여전히 망하지 않은 대통주를 판매하는 삼겹살집 앞에서 난 어떤 가게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틀 전 네가 왔을 땐 지나치지 않아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겠지만, 여긴 골목이 꺾이는 모서리의 반대편에 있는 사다리꼴 같은 땅이야. 지금은 '우삼겹'이라는 이름의 고깃집이 있어. '맛은 소고기이나, 고기는 돼지고기입니다.'라는 광고문구가 가게 안에 자랑처럼 적혀있지. 그 전에 거긴 맥주집이었어. 여름엔 정말 잘 됐었는데, 추운 겨울 동안에 방한하느라 바깥 유리를 포장마차처럼 꽁꽁 싸매다가 사람들이 안 와서 망했어. 그 전에도 거긴 맥줏집이었어. 마찬가지로 여름내 장사 멋지게 하다가, 겨울에 촌스러운 비닐을 씌워서 망했지. 그 전에 거긴 고깃집이었어. 검은 페인트로 모던미를 강조한 가게였는데, 여름 내내 손님이 끊이지 않다가 겨울에 포장마차처럼 외관을 싸매서 망했어. 우삼겹집은 과연 올해 겨울에 포장마차가 될 것인가. 중요 관전 포인트야.

(주. 2017년 현 시점에서 '우삼겹'집은 포장마차처럼 외관을 꾸미지 않았고, 결국 망하지 않았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사람이 기억을 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익숙한 장소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개념을 하나의 쌍으로 묶는 거라고 하더라. 예를 들어, 우리가 등교하는 거리. 외대앞 - 던킨도너츠 - 편의점 - 학교 정문…과 같은 장소들에 내가 외우려고 하는 개념을 붙이는 거지. 외대앞에는 Ella, 던킨도너츠에는 Es, 편의점은 Mi, 학교 정문은 Destino와 같은 형태로. 사람이 가장 기억하기 쉬운 곳이 장소라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매일 같이 마주치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그 장소를 보았던 기억은 뇌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 동면하듯 자리잡는대. 그래서 그 기억에 무언가 다른 생각들을 심을 수만 있다면, 그 기억들도 내게는 중요한 것이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말인데, 내 주변에 자리잡은 공간들이 허무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회사 앞에 과감히 자리잡은 브런치 카페도, 항상 망하기 일수였던 위치에 있는 우리동네 우삼겹집도, 낙성대를 지나 항상 조용히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줘서 소중하지만 장사는 안되는 것 같은 지하 카페도, 이번에 지하철 역에 새로 리모델링한 소중한 내 단골 편의점도 모두 망하지 않고 내 풍경 속에 남아 있어 준다면. 가을이 끝날 즈음이 되면 낙엽이 질 거야. 눈이 내릴테고, 그 위엔 벚꽃이 피겠지. 그러고 나면 매미가 쩌렁쩌렁 울어대는 여름이 올 거야. 그 무덥고 짜증나는 일상 속에서 나의 풍경은 바뀌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주길. 그렇게 남아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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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