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2. 27. 23:57
음식점에 와서 
가족들 혹은 친구와 함께 음식점에 와서, '맛있다'라던가, '이 음식점 참 괜찮다.'라는 말을 연발하는 것이 어딘지 서글프다. 

몇 달 전에 대학교 동창 한 명을 우연히 만나서 함께 술을 마시러 갔다. 동네에서 괜찮은 오징어회 집을 알게 되서 그곳에 가서 함께 오징어 안주 삼아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사실 서로 대학교 때부터 친한 편은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안면은 있었지만 서로 관심사가 뭔지도 잘 모르는 편이었다. 어떤 주제를 좋아하냐고 내가 물어보는 타입도 아니었거니와, 그 쪽도 자연스럽게 나를 보면서 관심사가 맞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 우린 별로 친하지 않은 타입이었다. 그런 뒤에 군대 전역 후 다른 친구 한 명을 껴서 셋이서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그 때도 셋이서 어울리며 수업을 듣긴 했지만 그럼에도 같이 친한 사이라고 자부하진 못했다. 다시 만난 지가 어언 3년이 되는 터라 서로의 인연도 끊어진 상태였다. 

우린 음식점에서 이 집 참 괜찮네, 안주가 죽여준다, 술이 술술 넘어가는구만 이라는 식의 후렴사를 던지긴 했지만 사실 그런 말을 하지 않고서는 딱히 서로가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그 음식점은 계속 새로운 것을 보여주던 터라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로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해본 터라 왠만하면 그런 술자리를 가질 만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함께 밥 먹은 건 오랜만의 일이었고, 함께 외식한다는 것도 즐거운 터라 동네에서 꽤 유명한 집을 찾아가서 먹은 건데 그 때문인지 대화의 주제가 상당 부분 먹는 쪽으로 쏠렸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뵙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대화가 식사의 대부분이 되어버린 것인지, 미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7. 12. 26. 23:52
나의 시작은 언제일까 
어렸을 땐 그게 참 무서웠다. 내가 처음으로 시작된 순간이 언제였는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은 신기하다. 기억은 신기하다. 기억이 있기 전엔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종교는 전생을 이야기하고, 과학은 빅뱅이라던가 우주의 기원 혹은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하지만, 나의 기억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가 갑자기 기억을 갖게 되었다. 시간은 그 때부터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고, 공간은 그 때부터 내게 의미가 있었다. 그 전엔 아무 것도 없었다. 역사를 배우면서 나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사실 그건 내게 의미가 없었다. 나의 기억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어린 마음에 그래서 더 종교에 빠졌었다. 종교가 내게 어떤 중요한 답을 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종교는 내가 시작한 순간보다는 내가 끝나는 순간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들 거기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나처럼 시작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는 건가. 그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니 그런 것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걸까? 

시간은 이미 고정되어 있고, 나는 마치 컴퓨터 속에서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것처럼 인생을 다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명은 그나마 평안을 주었다. 그럼 뭐, 시작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설명은 그저 가설일 뿐인지라, 다시금 마음이 불안해진다. 난 언제 시작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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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국내소설2017. 12. 25. 20:30

저자 : 나도향 
출판사 : 더플래닛
초판 1쇄 발행 : 2015년 3월 12일 (발표 : 1925년) 

1. 운명에 오차가 있지 않을까요
운명을 믿으시나요? 어렸을 때 상대성이론을 설명한답시고 시간의 형태가 마치 공간과 같이 쭉 늘어져 있음을 설명하는 잡지를 읽은 이후로 내 머릿속엔 운명이란게 분명 존재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지금은 내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어릴 적엔 종교지도자가 되고 싶어할 만큼 종교에 대한 믿음도 강했었는데, 종교가 내게 보여주는 기본적인 이론 역시 운명을 기본 바탕으로 두고 있었다. 기독교에선 베드로와 유다가 반드시 신을 배신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이들이라 설명하면서, 그들의 차이점은 결국 그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배신한 채로 남았는지로 설명하는데, 지금도 이런 설명은 매우 불확실하고 어처구니 없을 뿐이다. (만일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또한 그 운명이 진짜라면) 애초부터 배신하지 않을 운명을 가진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른들은 내게 '신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주신단다'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합당한 말인가? 유다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벙어리 삼룡이 같은 소설은 운명에 대한 일종의 저항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삼룡이의 삶은 비참 그 자체이다. 어려서부터 말도 못하고, 흉측하기 짝이 없는 외모에, 누군가의 종살이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삼룡이란 사람이 신의도 있고, 억센 면도 있어서 참 괜찮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갖고 태어난 것이 모자란 탓에 사람들에게 놀림받고 고통 받으며 살아간다. 

삼룡이는 연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신세 탓에 쉬이 누군가를 좋아하지 못한다. 물론 소설 마지막에 큰 사고가 일어나 불길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애정을 실현하고, 애모하고 있던 새색시를 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얼핏 이런 모습이 그의 운명에 대한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일 내가 지금도 운명론을 믿는 입장이었다면, 그것이 절대적인 100%의 확률이라고 믿었다면 난 삼룡이가 불길 속에서 새색시를 구하는 장면은 의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어떤 외부적인 사건에 따른 수동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삼룡이의 성격과 경험 상,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사건이었다고. 

그러나 너무나 당연히 보이는 것 가운데에서도 확률에는 오차가 있다. 모든 일이 완전히 결정되었다고 말하기엔 관찰자로서의 시선이 갖고 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확률의 오차가 사람에게는 어떤 살아숨쉬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닐까? 사람이 그저 알고리즘이 아니라고, 살아 있다고.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았을 때, 그 색시를 내려놓았을 때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집은 모조리 타고 벙어리는 색시를 무릎에 뉘고 있었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사라졌을는지! 

2. '벙어리 삼룡이' 3줄 평 
- 짧지만 이야기도 담박하고, 깔끔해서 잘 읽힌다. 
- 노틀담의 꼽추랑 이야기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아마 참고해서 쓴 게 아니었을까? 
-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