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8. 25. 23:11
1년 전의 생각 
아래는 정확히 1년 전에 썼던 글이다.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아주 이상한 형태가 되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회사에서 회사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보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정말 눈코뜰새없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머리가 노래지고, 온 정신이 일에만 바싹 몰입되어 스펀지처럼 쭉 빨리는 듯한 느낌이 되었으면 좋겠다. 친구나 대학교 후배들이나 만나고 있는 동호회 사람들, 여자들, 남자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문자를 보내거나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더라도 “ 나 지금 엄청 바빠요. 나중에 통화해요. 나중에 연락해요. 나중에 톡할게요 “ 같은 이야기를 날리면서 나의 바쁨을 자랑하고 싶다. 이 과정에서 나는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싶다라던가, 나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라던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고 싶다던가 하는 감정을 위해서는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완전히 차치하고, 나는 단순하게 현재의 시간 속에서 완전히 빠져들어서 내 일을 하고 있다는 충만감에 빠지고 싶은 것이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여백의 미가 가득 담긴 한국 전통화가 아닌, 사방 곳곳이 빽빽한 무늬와 잡동사니로 가득찬 일본화와 같은 느낌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칼같이 퇴근하는 것이다. 퇴근할 떄는 “아, 정말 하루종일 너무 정신이 없었어. 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했고, 그 시간에 충실했어” 라고 고백하는 것을 꿈꾼다. 

실제 직장은 나의 이상을 조금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일을 맡기질 않는다. 어느 순간 내게 오는 메일이 완전히 끊겨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그 메일들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또는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메일을 쓰는 사람들이 단정짓기 때문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바쁜 업무 속에서는 내가 맡고 있는 일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관련 없는 일들에 몰입해서 일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순간이 잠시뿐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시간이 장기화 되면 권태감을 넘어선 당혹스러움, 당혹스러움을 넘어선 끔찍함이 느껴진다. 그럼 나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의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십중팔구는 헛다리 짚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무척 당혹스럽다.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 읽어보니, 내 생각이 얼마나 수동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내 비록 회사 안에서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이긴 하나, 그 안에서 내 의지와 내 꿈을 실현시키지 못할 것도 없다. 회사 업무 중 여유가 생긴다는 건 좋은 기회다. 이 때는 내가 평소 하고 싶었던 혹은 만들고 싶었던 것을 만들어야 한다. 만일 아무 것도 만들고 싶은 것이 없다면 그건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만들고 싶다는 욕구는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왜'라는 질문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회사 업무를 진행하면서 전달 받는 수많은 정보들은 가볍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만,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 보면 살펴볼만한 것들도 많다. 대체 이 제품은 왜 만들어진 것이고, 이 서비스가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우리 회사에서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넘치고 넘친다. 문제를 발견하면 그것은 '왜' 개선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문제에 대한 정보를 획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회사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이 된다. 회사 출근해서 퇴근하는 순간까지 정신없이 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회사가 치열함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돌이켜 나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어야 한다. 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일을 시키지 않냐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느냐로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다시 1년이 지난 시점에 이 글을 읽어보았을 때, 내가 다시 어떤 말을 들려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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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시, 에세이2017. 8. 24. 23:57
내 존재의 빈 감방
내 존재의 빈 감방 
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
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 
바람으로 구름으로 통하는 감방이에요 
그런데도 감방은 감방이로군요 

내 존재의 빈 감방
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 
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 

(바라미 구르미 멍청히 흘러간다) 

-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 중 - 

가둬짐에 관하여
친구들과 방탈출 게임을 가끔 하러 간다. 갇혀 있는 공간에서 다들 필사적으로 힌트를 찾는다. 밀폐된 공간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들 여유가 넘치긴 한다. 방탈출을 하러 갔을 때 밀폐된 공간이 갖고 있는 어떤 형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벽 한 쪽 면에는 60분이 줄어드는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바깥에 있는 데스크와 연결할 수 있는 인터폰도 있다. 게임을 하다가 정말 화장실이 급하다 할 경우엔 인터폰으로 요청해서 그 길로 바로 탈출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혹은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마구 부숴서 움직이면 사실 그 안에 숨겨진 여러 힌트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 물건은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타서인지 금새 부숴질 것처럼 허약하다. 나무로 된 상자는 바닥으로 던지는 즉시 깨질 기색이다. 친구들의 얼굴을 봐도 다들 즐거워 보인다. 인위적이기 짝이 없는 힌트를 찾고 나면, 그걸 맞춰나가는 재미에 푹 빠진다. 사실 1시간 안에 탈출하는 게 목적이라, 1시간을 넘기면 무조건 탈출한다. 목표는 그보다 짧은 시간 안에 탈출하는 것이다. 

갇혀 있는 공간이란 건 대개 그런 식이다. 굳이 방탈출이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우리가 '나 어딘가에 갇혀있다'라고 말하는 공간은 사실 누군가가 가둬둔 것이라기보단 내 스스로가 사회적인 규약에 맞춰서 가둬지는 것에 협력하는 것이 맞다. 회사가 싫으면 회사를 떠나면 되고, 학교가 싫으면 학교를 떠나면 되며, 나라가 싫으면 나라를 떠나면 된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상당히 귀찮고 힘든 일들을 뒤이어 나을 지라도 말이다.

정말 흉악스러운 범죄를 저질러서 '실물' 감옥에 갇히는 일이 아니라면, 모든 감옥에는 다 틈새가 있다. 이런 틈새를 메우는 것은 윤리라는 이름일 수도 있고, 혹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일 수도 있다. 혹은 귀찮음이라던가, 육체적 정신적 고통 때문일 수도 있다. 

외부적 감옥이 아니라, 내부적 감옥은 어떨까. 사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도 비슷하다. 내 스스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우고 있는 정신적인 감옥은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며, 그 감옥 안에서 규율을 따르고 있는 나 자신도 얼마든지 감옥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틈새가 있다. 생각보다 그 틈새는 넓고 깊다. 강박증적인 성격만 아니라면 더더욱이나 그 틈새는 넓겠지.
 

사실 애초에 내가 감옥에 가둬진다는 관념이 우습긴 하다. 애초에 나를 가둔 것은 누구이고, 가둬진 것은 또 누구인가? 이 둘이 모두 나라는 존재라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둘로 쪼개서 생각하는 것이 맞긴 하는 걸까? 


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7. 8. 23. 23:48
왜 회사에 들어가면 다들 불행해질까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민주 공화국이다. 여기서 '민주'라는 말은 국민에게 주권이 있음을 말하고, '공화국'이라는 말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서 혹은 그들이 대리한 사람에 의해서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나머지 한 가지 '자유주의'란 무엇일까.

초등학생 때 난 '자유'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 혹은 부모님이 '자유'라는 말을 쓰는 걸 본 적이 있긴 하나, 그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체감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자유'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내 경우엔 푸른 잔디 동산 위에 올라가 손을 번쩍 들고, '난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건 분명 미디어의 영향이다. 이미 어린이의 과정을 벗어난 상태에서 '텔레토비'의 이미지를 봤던 것, 그리고 TV 광고 어딘가에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봤던 것이 섞인 것 같다. 꽤나 괴상한 이미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에서 유관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민족주의를 부르짖을 수도 있고, 혹은 답답한 학교를 탈출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자유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검색하면, 보통 빈 체제라던가, 프랑스 혁명, 영국 혁명 등이 역사적으로 서술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유라는 개념은 엄밀히 말해서 참정권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자유와 그 안에서 엮이게 되는 평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사실 자유주의의 개념이 탄생한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상에서 발현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의식 체계가 변화하게 된 것이 더 큰 것이 아닐까.

사실 복종의 상황을 인식하는 것 자체도 어렵다. 계급이라던가 복종이라던가 하는 의식은 교육적으로 배우거나 깨치지 않으면 지독히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노예제가 이미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일제 시대도 끝난 상황에서도 여전히 옛 주인 옆에서 그들을 모시는 노예들에게서 이런 인간의 습성을 발견할 수 있다. 노예문서라던가 어떤 물질적인 예속이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의 정신에 뿌리박힌 복종의 형태는 끝나지 않고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종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진보이다. 16세기 라 보에시가 자신의 저서 '자발적 복종'에서 프랑스 왕정에서 계급제를 냉철히 꿰뚫고 이를 문제인식으로 느낀 건 이런 면에서 탁월한 것이었다. 

이런 걸 인식하고 나면, 그 위에 문제를 대체할 수 있는 개념들을 쌓아 나가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당대의 철학자들이 했었던 작업이었다. 민주주의의 개념이라던가, 자유주의의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의회제가 자리잡고, 추후 대통령제가 자리잡은 것도 이런 문제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자유라는 개념은 단순히 정치 국가적인 측면에서만 보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사실 자유라는 부분은 모든 측면에서 모두 함께 통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닌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양측이 모두 자유로운 존재라고 한다면 이는 페미니즘이 된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이 둘이 모두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사회주의적인 개념이 뒤따라 와야 한다. 모든 인종이 자유로운 위치에 서게 되려면 인종차별주의를 타파해야 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양측이 모두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고자 한다면 '어린이'에 대한 보호와 양육이라는 개념이 탄생해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 근대적인 교육개념이 탄생한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사실 자유라는 것은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우선되는 것이며, 개인과 사회가 발전되기 위한 기초 토양이다. 행복한 나라라는 개념은 사실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즐거운 삶이란 사실 자유로운 삶의 동의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친구들이 가끔 '나 행복해' 혹은 '나 지금 엄청 즐거워'라는 말을 쓸 때를 유심히 들여다 보면, 사실 그 말은 '나 지금 자유롭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고 있는 것 같은 부분을 관찰할 수 있다. 여행을 할 때 행복한 이유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일을 할 때 일이 즐겁고 재밌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단순히 그들에게 여가 시간을 많이 준다거나,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일이 즐거워지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일을 하면서 자신의 자유가 늘면 늘 수록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때문에 CEO에 위치한 사람이 가장 즐겁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얘기하면, CEO들은 책임과 재정적인 압박 때문에 매일 미칠 것 같다고 말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모든 직장인 중에 가장 즐거운 건 맞다. 그렇게 즐겁지도 않은 일인데 그런 압박을 느끼면서도 그 일을 할 이유가 또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는 나 자신의 자유에 의해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자유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즐겁다고 말하지만, 그건 일종의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고 혹은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자유도가 꽤 높기 때문에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회사에서 승진해서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선 결국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자유를 죽이고, 자신의 상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성공한다. 부하는 상사의 뜻을 철떡같이 알아듣고, 그에 맞춰 일을 진행해야 하고, 상사는 다시 자신의 상사의 뜻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회사 모두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따라야 하는 사람은 고객이다. 고객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자유를 죽여야 한다. 따라서 회사란 본질적으로 자유를 희생하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지금 회사 다니기 싫다고 이런 글 쓰는 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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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