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8. 28. 23:34
그곳엔 맥락이 있다 
10년 전에 했던 게임을 요즘 다시 해보고 있다. <역전재판>이라는 게임이다. '나루호도'라는 변호사를 중심으로, 수수께끼같은 범죄현장과 법정을 오가며 피고를 변호하고, 숨겨진 진실을 찾는 추리게임이다. 출시된 건 벌써 15년이 지난 고전 게임이지만, 한국어판으로 정식 출시된 건 2012년도에 모바일로 나온 것이 처음이다. 물론 나를 비롯해 오래된 팬들은 해적판으로 번역해서 게임을 즐긴지 오래였다. 그래서 게임이 나왔다는 건 기억했지만, 굳이 열어서 다시 해보진 않았다. 

평소 듣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우연히 '13 67'이라는 홍콩 사회파 추리소설을 알게 됐다. 최근 몇 년 간 제대로 된 추리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팟캐스트 소개를 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뭔가 가슴 뛰는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서점을 뒤적뒤적 거리다, 무슨 생각인지 <역전재판>이 떠올랐다. 이미 10년도 더 전에 플레이 했던지라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왠지 다시 게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역전 재판>을 하다보니 느낀건데, 사실 10년 전엔 제대로 문제를 풀었던 것 같지도 않다. 에뮬레이터를 켜놓고 게임 하면서, 모니터 한 쪽으론 공략집을 보면서 공략을 따라가며 플레이했다. 추리게임이라는 건 원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이건 왜 이런 것이고, 저건 왜 저런 것이야.'라는 걸 보는 맛 아닌가? 10년 전의 난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주인공이 외치는 '이의 있소!'라는 일본어를 들으며 흥분했던 것이 전부였던 것 같기도 하고, 주인공이 핀치(위기)에 몰리면 울리는 소름끼치는 BGM에 공감했던 게 전부였다. 

1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 덕분에 게임을 꽤 즐기고 있다. 지금은 아예 공략본을 보지 않고, 천천히 맥락을 짚으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다. 10년 전엔 대체 이 이야기가 왜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엉뚱한 헛수고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미 한 차례 게임을 해본 덕인지 혹은 내가 맥락을 보는 능력이 늘어난 것인지 꽤 즐겁게 플레이하고 있다. 

모든 일에 맥락이 있다는 말은 과연 맞는 말일까? 예를 들어, 내가 오늘 저녁에 맥주 한 캔을 마셨다면 그건 어떤 맥락인가? 미안합니다. 별 맥락 없습니다.  


'잡문 > 기타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게 좋아요  (0) 2017.09.06
의견을 말하긴 어렵다  (0) 2017.08.29
분노가 없는 자리  (0) 2017.08.27
1년 전의 생각  (0) 2017.08.25
왜 회사에 들어가면 다들 불행해질까  (0) 2017.08.23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