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8. 1. 23. 23:48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남겨졌다.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왔는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리하면 어디선가 물결처럼 술렁이며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가늘게 떨고 있는 생의 순간들이 방안 가득 들어 찬다. 아직 마르지 않는 글썽거림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다. 글썽거리는 건 빛나고 축축해서 맘에 든다. 무수한 너와 내가 무수한 나와 너로 밀려왔다 사라진다. 경계의 이편과 저편에서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득한 시간을 포갠다. 밀고 당기고 자빠지고 일어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고 나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윤곽이 생긴다. 점과 점이 모여 이 세상 모든 선이 되듯, 애초부터 저 혼자가 아니라는 듯, 또는 저 혼자라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있는, 그러니 살아라. 나만 그런 게 아니다. 
-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中 - 

비록 그것이 비겁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비겁함으로서 이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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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8. 1. 22. 23:50
어떤 이미지가 있다. 

후후 소리내어 불면서 커피를 마시는 이미지. 내가 갖고 있는 주식이 올라서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의 모습. 어떤 맛난 음식을 소리내어 먹으면서 그 풍미에 푹 빠져드는 이미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 그리고 저녁에 혼자 술을 마시면서 서글퍼하는 이미지. 

그런 이미지 때문에, 그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내가 그 이미지가 되곤 한다. 그러고나면 한참을 후회한다.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서보니 별 거 없구나, 깨닫는다. 혹은, 내가 애초에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행동을 개시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먹는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내가 어떤 새로운 이미지를 향해서 움직이기 전에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어떤 행동이나 자세 혹은 나의 상황 같은 것이 과거의 내가 원하던 나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내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나의 이미지를 동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한다. 나 자신의 시야에서는 한 없이 초라한 것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선 목적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었을 때, 내 삶에서 어떤 궤적이 크게 바뀌었을 때 지금의 난 그 때의 나로서는 감히 가질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래, 그 땐 그랬었지라고 외치면서, 혹은 한없이 과거를 부끄러워 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할 것 같다. 

라고 어떤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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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8. 1. 21. 23:42
요즘 네이버에 가면 희안한 서비스들을 많이 시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디오클립'이라는 서비스다. 특별한 건 아니다. 팟캐스트의 일종이다. 일종의 온라인 라디오인데, 기존의 팟캐스트, 팟빵, 팟티 같은 서비스들은 플랫폼만 다를 뿐이지 인기있는 콘텐츠도 비슷비슷하고, 서비스의 방식도 비슷비슷하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이 다른 건 몇 가지 미묘한 포인트들이다. 첫 번째는 카테고리다. 기존의 팟캐스트에서 가장 질리는 부분은 정치 팟캐스트가 너무 많다는 것. 사람들이 많이 듣는 팟캐스트를 찾고 싶어서 인기순위를 찾다보면 놀랄 정도로 사람들이 정치에 미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뭔 놈의 팟캐스트가 1위부터 100위 중에 대략 잡아 90%가 정치 팟캐스트란 말인가? 다른 종류의 팟캐스트를 듣고 싶어도 이미 순위권에 올라와 있는 건 모두 다 정치 팟캐스트라 제대로 된 콘텐츠를 찾을 수 없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경제, 문화, 영화, 인문, 그리고 좀 잡스러운 다른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다르다. 철저히 정치 카테고리를 배제했다. 나와 같은 니즈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 완벽하게 이해했다. 유명 팟캐스트 콘텐츠 '지대넓얕'이 2017년 8월 20일에 방송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0위권 안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듣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원한다. 그리고 그 콘텐츠의 장르는 더 다양하길 바란다. 정치 얘기는 좀 적당히 하자. 사람은 정치 얘기만 들으며 살 순 없지 않은가. 

두 번째 포인트는 콘텐츠의 시간이다. 대부분의 팟캐스트 콘텐츠들은 약 1시간 녹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를 다 듣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회사에 출퇴근 하는 시간이 그 정도라고 한다면 하나를 다 들으면서 이동할 수 있겠지만,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 콘텐츠가 정말 괜찮은 콘텐츠인지 다 알기 위해선 그 콘텐츠를 다 듣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런데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다르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10분 혹은 20분이다. 엄청나게 짧다. 아예 그 정도 시간으로 콘텐츠를 구성하라고 생산자들에게 규정해놓은 것 같은데, 그 덕분에 하나를 듣는데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10분에서 20분 정도의 시간만 주어지다보니, 방송 콘텐츠의 질도 올라갔다. 방송에 나온 사람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예전 팟캐스트의 1시간짜리 방송도 언뜻 들어보면 20분 짜리 잡담과 40분짜리 본론이 대부분이었다. 듣기도 싫은 잡담과 더 듣기 싫은 광고가 넘쳐난다. 이런 부분들이 '오디오클립'에선 싹 제거 되었다. 

놀라운 포인트는 네이버 '오디오클립'의 UX이다. 고작 20분짜리 방송을 1.5배속 혹은 2배속으로 들을 수 있다. 콘텐츠를 빠르게 소모하고 싶어하는 요즘 사람들의 니즈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덕분에 1시간 안에 10개 정도의 콘텐츠를 들어볼 수 있다. 책, 경제, 문화, 과학, 영화,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요점만 잡아서 빠르게 섭렵할 수 있다. 이런 걸 만들겠다고 생각한 기획력이 놀랍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왠지 네이버 '오디오클립' 광고 같다. 뭐,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좋은 앱을 나만 알고 있는 건 좀 아깝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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