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8. 1. 4. 23:51
오픈 북
대화를 읽으면 관측되는 기후가 있다. 소나기를 맞지 않았는데, 춥지? 하며 건네는 찻잔 속의 소용돌이, 침묵은 희미해진다. 펼쳐 놓은 표정에 네가 없어 틀린 예보, 체온에 깜박 속을 뻔한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두꺼워진다. 영영 보지 않을 책처럼, 또 만나자는 약속처럼 시작과 끝의 모든 구절은 반복된다. 꿈에서 접질린 손목으로 밥을 푸고 꼭꼭 씹어 먹으며 유예하는 슬픔은 자꾸 건강해진다. 미워하는 사람을 가둔 방마다 흉측한 내가 있고, 그런 나를 부르는 너의 친밀한 목소리가 헐겁다. 시합이 되어 버린 감정 때문에 길을 잃은 집은 고작 마음 한 칸, 한 칸의 한편에 배치된 책장, 책장에 기울어진 두꺼운 책, 그 속엔 온통 잃어버린 사람들로 쓰인 글이 있다. 날씨와 위로로 대신할 수 없는 구절마다 우리는 영영 찾지 못한 오탈자처럼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 밑줄만이 우리를 덧칠하는 
- 서윤후,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中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는 단어가 참 어려웠다. 친구라는 단어에 있어 내가 생각했던 예보가 맞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멀어진 시간 속에서는 이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고달픈 관계들이 있긴 하다만, 그런 것들이 내게 어렸을 때만큼의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굳이 두꺼울 것 없이 멀어지면 되는 것이 지금이라면, 그 당시엔 다 벗어던지고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양 살아가고 싶었지만, 매일 생각할 거리로 넘쳐났다.

물론 그 때 생각한 것 중에 쓸모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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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