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8. 1. 26. 23:4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분좋은 소식이 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미래의 일이 그립기도 하고 받은 적 없는 행복이 미리 만져지기도 하는 걸까. 어린이 병원에서 일할 때 한 아이와 자주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도 장화를 신고 다니는 친구였다. 우린 창가에 앉아 기차가 오가는 걸 바라보거나 비행기가 지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리면 기차와 비행기는 어김없이 지나갔고 아이는 기뻐했다.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여겼던 나도 기차가 달리면, 비행기가 날면 어느새 기쁨을 느끼게 됐다. 무엇이 사람을 기쁘게 할까. 지루한 기다림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이라야할까. 그렇다면 시 쓰는 나의 기쁨은 어디만치 달아났을까. 당도하지 않은 일을 그리며 간절하게 쓰고, 기쁘고 싶다. 달그락거리는 장화를 신고 복도를 걷던 그 친구처럼. 
-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中 - 

25살에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15살 때 내가 컴퓨터 게임과 만화책과 만화책을 좋아하며 흥분했던 것처럼 10년이 지난 시점에선 그 때만큼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책을 보며 꺄무라치게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거의 매일 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게임을 하면 언제나 밤을 새야 했고, 만화책은 언제나 10권 이상을 한 번에 독파하는 게 기본이었다. 고작 10년 정도 나이가 든 시점에서 그런 차이가 느껴졌다. 

다시 10년이 지나면서 생각은 점점 더 바뀐다. 또 다시 10년이 지나면서 생각은 또 바뀐다. 

나이가 들면서 여행이 즐거워지는 건, 왠만한 일로는 즐거워 질 수 없을 만큼 일상이 익숙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어제도 오늘 같고 그제도 오늘같다. 매일 새로운 일을 해본다고 날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사는 매일 매일 바뀌면서 혁신을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딘지 일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뭐 굳이 회사가 아니라, 집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그 영화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특별히 내게 어떤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기대할 수 있는 건 남지은 작가의 말마따나 기다림의 깊이 뿐이다. 기다림이 있으면 그래도 삶의 매력이 조금은 바뀐다. 나이가 들어서 여행을 하려고 하면 그래도 그리움이 깊어진다. 매일의 일상의 회색빛이 되어버렸을 때 여행하는 그 순간만이 내게 무지개색이 되는 환상을 맛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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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8. 1. 25. 23:52
지금 한 가지 생각이 나서 기록 삼아 적어둔다. 

여행이 일상보다 가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소모성이기 때문이다. 서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 참 좋다. 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그 사람들과 일상에 대해서 농담을 나누고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 무엇보다 그렇게 만났던 사람들과 다시는 보지 않는 사이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사람들은 그럼 내게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는데, 글이라고 하는 매체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허구가 되고 변질되더라도, 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참 좋다. 난 소심해서 그런 면에 대해 자꾸 눈치가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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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8. 1. 24. 23:56
아버지가 일하는 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네 회사가 특별히 어떤 이벤트를 열었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떤 충동에 의해서 임의로 그런 이벤트를 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일요일이라 그 날은 특별히 어디 갈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아버지 회사에도 주말 근무로 당직을 서시는 아저씨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근무를 하시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자가용을 타고 주차장에 내렸는데, 주차장엔 차가 몇 없었다. 회색 빛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있었고,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고 흰 구름은 동동 떠 있던 기억이 난다. 

건물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공공기관 건물들이 유난히 그렇듯이, 멋대가리 없는 디자인에 공간 효율성도 떨어지는 형태가 유난히 많았다. 주말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바깥보다 그곳은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을 다시 받은 건 십 몇 년이 지나 내가 군대에서 주말을 보낼 때였다.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서 동떨어진 무인도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지금이야 핸드폰도 있고 인터넷도 발달해서 어떤 장소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 당시엔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분리된 공간은 실제로도 분리된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이 건물 저 건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나는 처음 보는 아저씨들인데, 혹은 스치듯이 사라졌던 아저씨들인데 그들은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버지와 잡담을 나누시면서 나에 대해서 많이 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평소 자신이 신중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생각보다 훨씬 떠벌떠벌하는 성격이다. 

인상 깊었던 건 내가 받았던 시험 성적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실제 내가 받았던 성적보다도 조금 높은 점수를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을 때였다. 아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아마 그 점수의 격차가 꽤 커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동료는 나라는 사람을 실제 나보다 더 대단하게 전해들었다. 그 때 느꼈던 건 내가 실제 그런 점수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어떤 부끄러움보다는,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라는 감탄이었다. 

아버지 역시 사회생활을 하는 입장인지라 그의 아들을 통해 끝없이 잣대에 부딪치고 평가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니 조금이라도 더 잘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무던히 내게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행동을 했었으면서 직장에 나와서는 꽤나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 묘한 느낌을 받았더랬다.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선 그닥 인상이 없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실 뭐 그런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의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건 아버지가 할 일이지 그의 아들이 할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아버지가 은퇴해버린 시점에서 그 때 아버지가 어떤 의미를 찾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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