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5. 15. 23:02
깔때기
가끔 나 자신이 깔때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혼자서는 아무런 생각도 못 하는 사람인 거 같고, 혼자서는 아무런 말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인 거 같다. 이건 고등학교 때 정말 자주 했던 생각인데, 나라는 존재는 약 1주일 전부터 어제까지의 총합에 불과하다는 거다. 내가 어떤 멋진 생각을 하더라도 1주일이 지나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질 만큼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생각은 시험공부 할 때 꽤 유익하게 써먹었다. 1주일 전부터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면 그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던 멍청한 뇌 속에도 잠시 똑똑한 말들이 머물렀다. 덕분에 커다란 시험지 위에도 내 멍청한 유식함을 과시할 수 있었다. 

반대로 1주일을 멍청하고 남는 거 없이 보내는 경우가 있다. 온종일 만화책만 읽거나 미드를 정주행하거나, 혹은 친구들과 연속으로 술 약속을 잡아서 술기운에 허우적대는 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꽤 즐거웠던 거 같기는 한데,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나 계획을 세우는 게 어려워지고, '윙...'하는 것 같은 이상한 메아리만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된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들은 해풍에 바싹 말라서 버스럭거리는 소금 향만 남겨둔 채 쉽게 부서지는 먼지가 된 느낌이다. 

내 방 책상엔 요즘 한 페이지, 두 페이지씩 조금씩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박현택 디자이너가 쓴 '오래된 디자인'이다. 가끔 마음 가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기에 적합한 미술 에세이다. 머리가 텅 비어서 윙윙거릴 때 펼쳐서 읽어보기 참 좋다. 

구석기인들의 주먹도끼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물방울 다이아몬드와 비교해 볼 때 주먹도끼는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지만 너무도 소박하고 겸손하다. 빛깔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데 적합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사용자의 손에 맞게 적당히 길이 들었을 것이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쓰임새에 가장 맞춤한 모양을 이루어 낸 완결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과거에서부터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물건들을 하나 하나 관찰하면서 그 안에 담겨진 디자인과 사람의 생각을 탐구한다. 똑똑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허세도 담겨 있지 않고, 그렇다고 개인적인 감상에 잔뜩 젖어 들어서 일기장에나 쓸 법한 글을 쓰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글을 전개한다. 

그래서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대체 이 사람은 이 글을 쓰기 전 1주일간 어떤 깔때기를 대고 있었던 걸까. 정말 그 1주일이 대단하면서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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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