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3. 21. 19:41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이야기에 관하여 

2013년 6월 14일에 출시된 'The Last of Us'라는 게임을 아시나요? '언차티드'라는 게임 시리즈를 4부작으로 내놓아 크게 성공을 거둔 너티독이라는 게임사에서 만든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게임입니다. 2033년, 정체불명의 곰팡이균이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류 대부분이 좀비와 같은 곰팡이 괴물이 되거나, 죽어버린다는 배경 속에서 그려지는 이야기입니다. 게임의 큰 줄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황폐화된 미국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 아이가 미국을 동에서 서로 길게 가로지르며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서 좀비들을 만나고, 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헤치거나 식인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사람이 없어져버린 땅에서 왕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희미한 인류애가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이 게임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게임사 너티독은 '너티 독 최고의 순간'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판매가 시작된 지 1주일 만에 130만장 이상을 팔아치울만큼 상업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2013년 세계 최고의 게임 1위에 꼽히기도 했지요. 

이 게임 이후로 나온 거의 모든 종류의 RPG 게임들은 이 게임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고 느껴질만큼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The Last of Us'가 전해준 황폐한 게임 분위기, 아름다운 그래픽, 게임 속 캐릭터인 AI와의 협력 플레이, 훌륭한 UX 등. 하지만 이 게임에서 다른 훌륭한 게임 시스템보다도 극찬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스토리 그 자체였습니다. 좀비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한 중년 남성과 그가 만난 10대 여자 아이가 좀비가 가득찬 세상을 뚫고 여행을 가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끔찍하고, 사람들은 짐승과 다름없었고, 희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나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코맥 매카시의 'The Road'처럼 말이죠. 


'The Last of Us'라는 게임이 2006년도에 퓰리처상과 제임스 테이트 블랙상을 수상한 코맥 매카시의 'The Road'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코맥 매카시가 자신의 아들과 자신이 폐허가 된 세상에 남겨진다는 가정 하에 쓰여진 이 책은 '감히 성서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비범한 홍보문구를 갖고 있는데요. 앞서 설명한 'The Last of Us'와 이야기적인 맥락이 매우 흡사합니다. 'The Road' 역시 몰락한 지구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남쪽 바다를 향해 여행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섬세한 이야기와 배경의 구성, 그리고 통조림, 콜라 등에 대한 묘사들은 'The Last of Us'에서 실제 화면으로 재구성된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물론 'The Road'에는 세상이 황폐화된 원인이 따로 설명되어 있지도 않고, 좀비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흡사해서 완전히 베껴서 차용했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찾아보니, 실제로 'The Last of Us' 속에는 이 책에 대한 언급도 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이 소설은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의 구성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책의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이 아쉽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The Last of Us라는 게임도 게임 화면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름답게(혹은 끔찍하게) 느껴저서 다음 챕터로 넘기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게임과 소설, 각기 다른 장르를 보면서도 왜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이런 종류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유행하던 것인데 말이죠. 게임으로 치면 이미 폴아웃 시리즈가 유행을 쳤고, 이미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좀비물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기초가 짜여져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부산행'이라는 영화에서도 흥미로운 좀비물이 만들어져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꽤나 히트를 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가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제목으로 멋진 만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적도 있지요. 그보다 조금 더 뒤로 가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일본 젊은이들의 삶을 뒤바꾼 사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두 작품과는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두 작품은 황폐화된 세상 속에서 신비주의라던가, 정치게임, 영웅 이야기들을 싹 지워버린 상태에서 그 상황 속에서 고통 받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어코 한 개인이 아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게임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비범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되었고, 아버지로서 어떻게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책을 다 덮고, 혹은 게임을 다 끝내고 나면 세상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복잡한데 묘하게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의 세상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