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2. 1. 23:38
내게 있어 가장 큰 성격의 결함을 말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안전선을 지키고자 하는 점이다. 

어릴 적에 삼국지 PC 게임을 좋아했다. 삼국지3부터 삼국지12까지. 게임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게임을 하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보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훨씬 비효율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병력이 모이고, 장수가 모이면 최소한의 기준만 넘겨도 전쟁을 시도해볼 법 한데, 아주 안전한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전쟁을 걸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임에서의 승산을 생각했다기보단 내 마음에서 어떤 안정감 같은 것을 얻길 원했던 것 같다. 

게임 뿐 아니라 삶에서 대부분의 것들이 비슷비슷한 양상으로 흘렀다. 언제나 위험한 곳에 있기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곳에 한 발자국 물러나서 행동했다. 안전하게 말하고, 안전하게 생각하고, 안전하게 행동했다. 그런 안전한 방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비난 받을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누군가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혹은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야망을 갖고 있거나, 어떤 미지의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런 안전선에서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안전선을 갖고 살아간다. 각자가 자신만의 기준에서 안전선을 그어놓고 그 기준 안에서 움직인다. 다만 그 안전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서울 지하철에 스크린 보드가 없었는데, 그 때는 플랫폼에 노란 선이 그어져 있어서 지하철이 들어올 때면 언제나 안전선 뒤로 물러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곤 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안전선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이 있었고, 혹은 그 안전선을 밟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아니면 더 뒤로 빠져나온 사람도 있었다. 이 중에 가장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시민의식을 갖고 안전선 뒤로 빠져 나온 사람이겠지만, 그것이 삶에서 어떤 도전을 하냐의 문제로 바뀐다면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안전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 안전선을 깨고 나오거나 혹은 안전선의 위치를 다시 그리는 작업을 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가슴이 두근 거리고, 혹은 두근 거리기도 하고, 나와 함께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여기저기 두리번 거린다. 내가 혹여나 바보 취급을 받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눈치가 없는 건지,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안전선의 문제에 있어 눈치가 없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과감히 안전선을 벗어나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이 단지 눈치없이 저지른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이보다 더 멍청한 일이 어디있을까.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고, 아무도 인정하지도 않는 도전이라는 것만큼 미칠 것 같은 일은 없다. 

이런 상상도 해본다. 만일 내가 1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어떤 발명을 해보기로 한다. 내가 이곳에서 어설프게 쌓아놓은 지식이라는 것이 과연 1000년 전의 순간에 적절하게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결국 난 그 1000년 전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단 하나의 이론이라도 설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현대사회의 논리구조는 어디까지나 현대사회에 통용되는 것이고 현대사회에 구축된 것이다. 과거 사회(그리고 그 과거 사회란 소속된 집단이 어디냐에 따라 크게 다를 것이다)에 맞는 설득의 방식을 써야 한다. 

내가 심지어 완벽하게 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안전선을 완전히 벗어나 혼자서 고독히 있는 순간 힘들어질지도 모르는 나 자신을 상상하게 된다. 난 그곳에서 누구부터 하나하나 설득해나갈 것인가. 누가 나의 동료가 되고, 누가 나의 고객이 될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 안전선은 어디에 그어져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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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