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2. 18. 23:04
채소 가게 
어릴 적엔 아파트 단지에 살았었는데, 그곳엔 채소 가게가 근처에 없었다. 사람들이 채소를 사려면 읍내에 나가야 살 수 있었는데, 읍내로 나가려면 버스를 타야했다. 버스가 오는 간격이 30분에서 1시간 간격인 시골이었던지라 사람들이 채소를 사는 건 우유 한 통이라던가 새콤달콤 같은 간식 거리 하나 사는 것보다도 힘들었다. 그래서 채소를 가득 싣고 온 어떤 노부부가 채소 판매를 독점했는데, 부모님께 언뜻 전해들은 바로는 그들이 상당한 알부자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채소를 파는 삶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은 내가 아는 웬만한 사람보다도 많았다. 그들이 돈이 많았던 시절이 해외 여행이 흔했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아마 그들은 미국은 커녕 일본도 그리 흔히 다니던 부부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뒤로 채소 가게는 내게 묘하게 부를 의미하는 어떤 상징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채소가게가 대형 마트 안 쪽으로 숨어버렸지만, 대학생이 되고 서울로 온 뒤로는 동네에서 채소가게를 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채소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알부자라는 소문이 꼭 돌았는데, 동네 아랫바닥에서 채소가게를 하는 청년들은 상당한 돈을 모아 아파틀 샀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보다 윗집에 자리한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건물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람이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채소가게 주인이 큰 돈을 모았다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을 느끼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근데 또 그런 위화감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모으는 건 또 채소가게인 것이 아이러니다. 아마 사람들이 가장 자주 가는 동네 가게 중 하나가 채소가게인 것이 원인일 것이고, 그런 채소가게가 보통의 경우 독과점의 형태를 띄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한다. 근데 또 채소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엔 너무나 큰 돈이 되지 않는 종류의 상가인지라 사실 큰 돈을 벌었다고 하는 것이 어딘지 모를 유언비어처럼 느껴지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근데 뭐 내 경우에도 채소가게는 어딘지 모를 친화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 가끔 갈 때마다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묻고, 계절에 따라 들어온 과일이나 채소를 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외에서 6개월 정도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불편은 내가 알고 살만한 채소나 채소가게가 없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괜찮은 빵집이 없다는 것이었다. 빵집이야 나중에 가서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지만, 채소가게로 괜찮은 곳을 찾는 건 꽤 어려웠다. 그게 아마 국적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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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