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2. 15. 23:49
신을 버리고 나를 채울 것 
친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신이 어디선가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라는 전제에서 시작하지."
스미스는 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스스로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혼자 있어서 발각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내가 도둑질하는 걸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나 자신은 지금 내 행위를 지켜보고 있질 않은가. 그러므로 범죄 계획을 세우는 그 순간에도, 공정한 관찰자가 나의 도덕적 일탈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게 된다. 
1. 러셀 로버츠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주)도서출판 세계사, 2015

대학 교양 수업에서 내가 어설프게나마 배웠던 가장 재밌던 양자역학의 개념 중 하나는 '관찰자'의 유무였다.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물질이 특정한 확률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이 물질은 파동의 형태를 띄기도 하고 입자의 형태를 띄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확률로서 작동하기 때문에 전체 행동 패턴으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패턴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여기서 '관찰자'가 등장하는 순간 그 패턴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근데 사실 난 여기서 관찰자라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상징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관찰자는 언제나 인간이어야 하는가? 관찰한다는 말의 정의가 무엇인가? 어떤 의지치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혹은 생명체에서 시각 정보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어차피 이런 분야를 전공하는 입장도 아니고,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도 없었던 터라 난 그저 그것을 은유적 의미에서 이해했다. 어쩌면 이런 이해가 바보같고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내 은유적인 이해에 따르면, 관찰자라는 것은 어떤 주체가 특정한 목적의식을 갖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모든 종류의 행위로 이해했다. 이 주체는 개별성이 강화되고, 의지가 명확해지면 명확해질 수록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미시적인 영역을 넘어서 가시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이뤄낸 성취와 일맥상통한다고 판단한다. 한 주체가 점차 개별성을 획득하고, 의지를 가지면서, 자신이 목적하는 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이 커지면 커질 수록 그에게 주어졌던 기본적인 운명(?)적인 틀을 깰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도덕성이 될 수도 있고, 경제적인 의지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애정 혹은 우정일 수도 있고, 리더십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주어지게 되는 기본 바탕에는 본인을 향한 어떤 관찰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와 나를 둘러싼 주변환경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에서 의지와 행동이 나온다. 이게 틀린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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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