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0. 19. 23:26
외동의 바둑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주말 내내 혼자 시간을 보냈던 적이 꽤 많았다. 형제 자매가 없어서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부모밖에 없었는데, 사실 아버지를 집에서 봤던 기억은 거의 없다. 애초에 집에 있다 하더라도 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거나, 혹은 나에게 유익한 걸 보여준다거나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언제 한 번이라도 과학원, 동물원, 식물원, 미술관 같은 곳을 데려가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 땐 다 그랬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 살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딱히 갈만한 장소라곤 바다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이따금 바다로 가자고 할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아버진 회사 회식에서 배우셨던 걸 가족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주로 성당에 봉사활동이나 단체활동에 나가시곤 했다. 성가대를 하셨고, 레지오 활동도 하셨다. 솔직히 뭐 그리도 할 일이 많으신지 날 두고 밖에 나가신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나이에 그렇게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 부지런함이 이해가 안 갈 따름이다. 

주말에 다른 친구들은 학원을 다녔을까? 평일이고 주말이고 하루 종일 계획을 가지며 시간을 보내는 어린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생소하게 들린다. 그렇게 배울 게 많을까.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하루 종일 멍 때리거나 혼자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많았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나도 친구들을 찾곤 했다. 틈날 때마다 친구를 찾아가는 건 내 몫이었다. 우리 집으로 친구가 오는 경우는 1년에 몇 번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 동네 친구들 치고 내가 방문하지 않은 녀석들이 없었다. 물론 친구들에게 난 덤이었다. 그 녀석들 중에 외동은 한 명도 없었다. 당시엔 그런 때였다. 이 때문에 내가 친구들을 찾아가서 노는 게 구걸처럼 느껴진 적도 많았다. 친구따위 무시하고 나 혼자 놀기 위해 가까스로 혼자 놀고자 했다. 그 덕에 책도 많이 읽었다. 집에 있는 웬만한 책은 다 읽어본 것 같은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다지 책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책이 무척 한정적이었다. 어머니는 그나마 내게 도움이 될만한 책을 사고 싶어하셨는데, 그렇게 고른 것이 고작 <어린이 동화 세트>라던가 <삼국지 만화 세트> 같은 것이었다. 삼국지 만화야 물론 만화책이라 내가 무척 재밌게 읽긴 했지만, 동화책은 대체 뭔 재미란 말인가. 유치함도 유치함이지만 무엇보다도 원 저자가 써놓았던 깊이 있는 탐구들을 죄다 짤라놓고 오공 시절의 교훈만 남겨둬서 특히나 끔찍한 책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제대로 된 책을 처음으로 읽어봤다고 느낀 건 중학교 때 스스로 책을 사면서부터였다. 그 전까진 세상에 좋은 책이 그리도 많은 걸 몰랐지. 

물론 책만 본 건 아니었다. 집에는 컴퓨터도 있었고 TV도 있었다. 근데 사실 이런 전자기기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인터넷도 있고, 어마어마한 미디어 정보가 있어서 제대로 된 컴퓨터 하나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게 지낼 수 있지만, 당시 내가 하는 컴퓨터는 386이었다. 386으로 하는 게임이라봐야 고작 고인돌 수준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내가 컴퓨터로 게임 하는 걸 특히나 경계하시는 분들이라, 처음 컴퓨터를 샀을 때 기본으로 딸려오는 게임 이외에는 내게 게임 하나 제대로 사주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여느 아이들처럼 컴퓨터에 빠질 기회를 잃어버렸다. 

심심할 때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된 건 바둑알이었다. 웃기는 일이지. 바둑 따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었는데, 바둑알이 내게 가장 장난감이었다니. 굳이 바둑알로 바둑을 해야 하나? 바둑알 하나만 갖고 있으면 정말 많은 게임을 만들어서 할 수 있다. 굳이 멋진 장난감이 없어도 됐다. 바둑알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알마다 높이가 다르고 지름도 다르다. 형태 중에서는 옆면이 불룩 튀어나온 것도 있고, 날카롭게 다듬어진 것도 있다. 가끔 흠집이 나 있는 바둑알도 있는데, 이런 놈들은 특히 내가 아끼는 것이었다. 난 그 흠집을 마치 사무라이의 뺨 상처처럼 바라보곤 했다. 

바둑알은 기본적으로 흰색과 검은색이 있는지라 내편 상대편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용이했다. 난 우리집을 배경 삼아 이야기 만드는 걸 좋아했다. 주인공은 멋진 상처가 있는 검은 바둑알이었다. 흰색 바둑알이 잡아간 검은 바둑알 동생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혹은 흰색알과 검은알이 싸우는 대하 드라마. 혹은 몸에는 폭탄을 짊어지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검은알 이야기 등. 꽤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내가 노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키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참 얘는 혼자서도 잘 노네."라고 했는데, 뭐, 실제로 난 잘 놀았다. 사람은 다 적응하는 동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말이지, 내가 굳이 혼자 놀고 싶어서 그렇게 논 건 아니야. 나도 내게 주어진 그 지겨운 시간을 어떻게든 헤쳐나갈려고 그런 놀이를 만들면서 지냈을 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조금은 화가 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쩌겠나. 다 지나간 시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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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