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0. 18. 23:55
말이 없는 관계 
친하다는 것과 친하지 않다는 것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수단은 침묵이 아닌가 싶다. 가끔씩 말 없이 서로 걸어가고 있어도 그 말없음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때, 그 침묵은 내게 힘이 된다. 물론 침묵이 편하다고 느껴지는 관계란 건 그리 흔치 않다. 가깝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고 있는 것만큼 고문이 되는 건 없고, 심지어 가까운 사람과도 오랜 침묵이 이어지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굳이 할 말이 없을 땐 노래를 흥얼 거리거나 이전에 했던 얘길 반복하곤 한다. 물론 다시금 침묵으로 되돌아 온다. 

그렇다고 대놓고 침묵을 하는 건 어렵다. 특히 상대가 뭐라도 얘기하고 싶어할 땐 나도 그 장단에 맞춰주는 편이 좋다. 하지만 상대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침묵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함께 산을 오르고 있을 때, 같이 맛있는 밥을 먹고 있을 때, 풀밭 혹은 사막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용한 어떤 곳에서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그런 순간 순간에는 굳이 내가 침묵을 하자고 마음 먹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침묵을 향하게 된다. 

침묵이 지나간 자리엔 항상 내 본심이 나온다. 내가 느꼈던 속내라던가, 나의 꿈이라던가,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라던가 하는 낯간지러운 이야기들이 침묵이 깔아놓은 바닥으로 차분이 내려 앉는다. 

인간의 대화와 교류는 대체로 말을 주고 받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즉 사고의 영역에.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약간의 고요함이 필요하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는 더욱 필요하다. 
1.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김영사, 2004

내 삶에서 가장 인상깊은 침묵 중 하나는 대학 친구와 함께 지리산에 올라 새벽 정상에서 바라봤던 일출에서 나왔다. 겨울이었다.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사람들은 두꺼운 등산복을 매섭게 뚫고 들어오는 산 바람을 헤치며 거짐 1시간을 기다렸다. 친구와 난 바위를 기대고 서 있었다. 딱히 어떤 말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냥 그대로 계속 있는 시간이 기억에 남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상대에 대한 내 신뢰감을 표현하려 할 때에 나는 침묵을 사용했다. 나의 침묵은 그야말로 열렬한 경청의 한 방식이었다. 진중한 약속과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침묵을 좋은데에다 써왔다. 

2. 김소연 <시옷의 세계>, 마음산책,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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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