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0. 9. 22:39
결점을 사랑할 수 있는가? 
희안하다. 이젠 꽤 이곳저곳 여행을 다녀봤지만, 정작 내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는 건 항상 최악의 순간들 뿐이다. 계획이 어긋났을 때, 먹고 싶었던 걸 못 먹었을 때, 도둑질 당했을 때, 친구랑 싸웠을 때. 이상하게 그런 시간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여행만 그런 건 아니다.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것이 다 비슷하다. 기억에 남는 건, 내가 성공했다거나 혹은 시험을 통과했다거나 혹은 내가 계획한대로 잘 된 순간이 아니라, 내가 원한대로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초조함이다. 기쁜 순간은 언제나 내가 바라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뤄졌을 때야 비로소 기억에 남고, 내가 예측했던 슬픔은 언제나 생각한 것보다 슬프지 않다. 그런 건 기억에서 쉽게 지워진다. 사람도 비슷비슷했다. 

시간, 공간, 사람, 관계, 대체로 이런 것 중에 기억에 더 강하게 남는 건 장점보단 결점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글을 보게 되었다. 결혼정보업체가 제시한 상위권 스펙을 가진 여성들의 신상정보라고 한다. 보다 보면 묘하게 느껴지는 생각이, '다 비슷비슷하네.'라는 거였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에서 이런 말을 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이 이야기를 결혼정보업체의 신상에 적용해보면, "훌륭한 스펙은 대체로 그 모습이 비슷비슷하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인지라 각각의 스펙을 보면 한 두가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요소들이 보이는데, 그 모습들은 대체로 '결점'의 형태를 띄고 있다. 아마, 이런 스펙을 쭉 훑어보며 사람을 고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가 바라보게 될 부분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장점이 아니라, 결점에 달려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 결점을 수용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날리면서. 

생각의 초점이 결점으로 옮겨지면, 태도가 바뀐다. 예를 들어, 여행지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라고 치자. 대부분 그 여행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걸 생각한다. 그 여행지에서 어떤 음식을 맛보고, 어떤 장소를 갈 거고, 어떤 액티비티를 할 건지를 생각한다. 장점에 초점을 맞춘 태도다. 

반대로 결점에 맞춰 여행지를 골라보자. 위험한 장소인가? 도둑들은 많은가? 술은 금지되어 있는가? 그닥 볼 게 없어서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장소인가? 여행비가 비싼 곳인가? 이런 부정적인 질문들을 날리다보면 이 중에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잡힌다. 그리고 그 결점을 안고 있는 장소가 내가 갈 최고의 여행지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장점보단, 오히려 단점에 더 집중해볼 때 이 사람이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뭐, 굳이 사랑이 아니라 결혼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장점보단 결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야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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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