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0. 5. 23:56
다른 사람인 척 하기 
중학생 때였다. 처음 소설을 써보려 했던 건. 해리포터를 읽기 시작한 게 중학교 1학년 때였으니, 아마 그 영향이 가장 컸지 않았나 싶다. 당시엔 소설을 쓰기는 커녕 제대로 된 장편 소설을 한 권 읽는 것도 쩔쩔맸던 터라 제대로 된 글이 나오긴 어려웠다. 그래도 내 학교 친구들은 내가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게 담임 귀에도 들어가서 학급 문단에 작은 단편 하나라도 실을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그 전까지 내가 썼던 글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자기 만족에 가까운 글이라,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형 소설이라거나, 혹은 마치 내가 '이상' 같은 작가라도 된 양 현학적이고 남들 누구도 알아먹기 어려운 글을 쓰고 있던 터라  적당한 사람들이 읽는 적당한 글이라는 놈은 나오기 어려웠다. 

당시엔 한국에선 판타지 소설이라던가, 무협 소설 같은 부류가 막 인기를 이끌면서 문장력 있는 10대나 20대들은 누구라도 소설 한 번 써서 붕 떠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선 실력 있는(혹은 양판소라고 불리는) 10대들도 있던 터라 난 그네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써도 이것보단 낫겠다!'라며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정작 본인이 써놓은 글을 읽어보면 이건 서사도 없고, 주제도 없고, 캐릭터도 없어서, 대체 이걸 소설이라 해야할 지 시라고 해야할 지 장르 구분도 안되는 잡문이었다. 지금 내가 블로그에 쓰고 있는 잡문이라는 놈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한심한 종류였다. 

그래도 학급문단이라하면 나름 공식적인 문서이고, 40명 학급 인원들이 모두 한 번 쯤은 읽는 것인지라, 매일 저녁 불안에 떨며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제대로 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인물'이었다. 내 주변 인물래야봐야 중학생 수준밖에 안되고, 내가 관찰할 수 있는 어른이래야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그리고 동네에서 채소 파시는 아저씨랑 문구점 아줌마 정도가 전부였다. 차라리 그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뭐라도 썼으면 개연성이라도 있으련만 내가 쓰고 싶은 건 천 년 전의 왕국이라던가, 천 년 후의 SF 드라마였으니, 이건 뭐 말도 안되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이런 문제가 다 알아서 해결이 될테니, 그래, 나이나 들자. 라는 생각으로 어릴 적에 소설 쓰는 걸 포기했는데, 이건 큰 실수였다. 나이가 든다고 그런 게 다 해결이 될랑가. 사람이란 건 어디까지나 자기 반경이 있기 마련인지라, 자기 얘기를 쓰는 건 쉬울지 몰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건 정말이지 꾸준한 관찰과 그 상대에 대한 고민과 숙고가 필요하다. 그런 거 없이, 그저 시간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될 거라 생각하는게 어디 올바른 생각일까. 

이야기란게 다 그렇더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서 나오는 게 이야기다. 관찰없이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나라는 인간도 수십 년 같이 시간을 보냈음에도 쉽사리 알기 어렵다. 나라는 놈도 관찰해야 한다. 되새겨보고, 다시 살펴보고, 반성하고, 그렇게 시간을 지나면서 그나마 아는 척이라도 해야 겨우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쓸 수 있다. 그런데 어디 다른 사람은 쉽게 되겠나. 

근데도 똑똑한 사람들은 참 쉽게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쓰더라.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인 척 잘하더라. 

꼭 그런 놈이 있다. 

클럽 같은 곳에 가서 여자나 남자랑 어울려 지내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인 양 꾸며대는 녀석들. 타고난 거짓말쟁이들. 타고난 연기자들. 천재다 천재. 그런 똑똑한 사람들을 앉혀다가 소설이나 하나 써달라고  하고 싶다. 잘 쓰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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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