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10. 7. 21:31
술을 마시는 게 낭만적인 건가 
은연 중에 술 마시는 게 굉장히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것 같다. 드라마를 보거나, 에세이를 읽거나, 심지어 만화책을 읽고 있는 중에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술이라는 기호를 소비하는 방식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술을 소비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심지어 오늘 읽고 있는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이란 책에서도 비슷한 문구가 나온다. 

우리는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다가 우하하하 웃어버렸다.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쳐다보고 우하하하 웃었다. 우리 진짜 제대로 찾아왔구나. 이거 양 봐. 다 먹을 수 있을까? 잠깐만 사진 좀 찍자. 나 정신이 없다. 뭐지? 이 식당은? 먹어봐. 아, 떨린다. 이거 냄새부터 너무 제대로인데. 아, 이 속살 봐. 부드럽고, 부드럽고, 부드러워. 어떻게 이렇게 촉촉하게 굽지? 이 와인은 진짜 이 생선이랑 베프구나. CD가게 언니한테 절해야겠다. 이거 무조건 다 먹는 거야. 나는 다 먹을 수 있어. 이걸 어떻게 남겨. 
1.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 2016

고작 이 정도 문구가지고 이게 무슨 와인을 땡기게 하는 문구냐. 그냥 네가 와인 좀 마시고 싶어서 어거지 부리는 거 아니냐. 아니, 굳이 와인이 아니어도 되지? 그냥 맛난 음식에 술 좀 마시고 싶은 거 아냐? 맞다. 그게 정확한 심정이다. 

요즘엔 가르시니아라고 "식욕억제 + 탄수화물 흡수 억제"의 효과를 지닌 물질을 다이어트 보조제라고 팔고 있다. 대충 싼 건 2만 원에서 적당히는 4~5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데, 이런 보조제라도 먹으면서 식욕을 억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같은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에는 특히나 그렇다. 과하게 먹지 않겠답시고 저녁을 가볍게 먹은 날에는 거의 100 퍼센트 확률로 야식이 땡긴다. 이 우라질 몸퉁이 같으니라고. 더 심각한 건 야식을 먹으면서 항상 술이 땡긴다는 거다. 나 같은 경우 매일 같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이렇게 주인공이나 저자가 술을 마시는 모양새가 묘사되면, 그게 어쩜 그리도 낭만적으로 보이는지 이 한심한 몸퉁이는 그 모습을 따라하라고 나를 부추긴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야식이나 술이 땡길 땐 대놓고 그 욕망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억제 방법이다. 예를 들어서, 유튜브에 들어가서 술 마시는 사람의 모습을 보거나 혹은 수백 그릇의 음식을 먹는 유명 유튜버의 영상을 보는 거다. 그런 모습을 보면 묘하게 낭만성이 사라진다.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행위가 낭만성이라는 멋진 코트를 열어젖히고, 단지 동물적 본성만이 남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일까. 혹은 그 모습을 보며 내 뇌 속에선 내가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묘하게 야식 생각이 사라진다. 신기한 일이다. 

어떤 행위라던가, 욕망에 앞서, 그 행위와 욕망을 규정짓는 <가치>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술 마시는 것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가치>를 부숨을 통해서, 술 마시고 싶은 욕망까지도 부숴버리는 것이다. 

바라던가 호프집이라던가, 혹은 자기 집에서 혼술 하는 사람들이 소비하고 있는 것이 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술에 대한 이미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때문에 내가 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무엇보다 술에 대한 이미지를 박살내야 한다. 낭만적인 모든 걸 부숴야 한다. 그래야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근데 지금도 매일 같이 내 주변에선 술을 둘러싼 낭만적인 이미지가 넘쳐난다. 참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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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