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5. 22. 23:32
실내 슬리퍼
미생이란 만화를 봤다. 그 전까진 로퍼라던가 구두라던가 운동화를 신고 회사에 출근했다. 셋 중 하나를 신고 출근하는 건 기본적인 예의였다. 그리고 그건 일상이었다. 미생이란 만화를 본 뒤론 내가 회사에서 출근할 때 신는 신발과 회사에서 신고 있을 신발을 구분해서 관심을 가졌다. 내 뒷자리에 앉아 있는 차장님이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부장님이 회사에서만 신는 편한 구두를 즐겨 신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만 신는 슬리퍼나 구두는 이점이 있다. 평소에 바깥에서 신는 신발들을 망가트리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이곳 저곳 이동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에 출근한 뒤로 자신이 회사에 출근했다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었다.

미생이란 만화에서 다루고 있는 또 하나의 이점은 그것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였다. 사실 슬리퍼라는 건 평소에 신고 다닐 때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품고 있지 않다. 회사 내에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때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예의를 충분히 차리지 않다는 걸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임원과 함께 맞대면 하는 곳에 간다거나 중요한 자리로 이동할 때는 슬리퍼를 벗고 원래 신고 왔던 신발을 다시 신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입사한 지 2년이 되지 않았을 때, 회의실에서 마주쳤던 알고 지내던 대리님이 '이야, XX씨 참 자유롭고 좋네.'라는 멘트를 날렸을 때 어딘가 한 구석에서 서늘해졌던 기분은 아마 이런 기본 전제에서 다가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런 종류의 기분들이 다른 회사에서도 모두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다녀본 회사라고 하는 건 아주 한정적인 몇 개 회사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기준을 바탕으로 우리 나라에 있는 모든 회사들이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은 또 없겠지. 

여튼 이런 글을 쓰는 건 지금 내가 회사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서 블로그 글을 쓰고자 남아 있는 탓이겠고, 그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장실에 잠시 들를 때마다 이 슬리퍼 때문에 묘한 느낌을 받는 건 내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슬리퍼가 너무 큰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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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