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재라는 로망 


어릴 적부터 제가 가진 30가지 로망 중 하나는, 수 천 권의 종이 책으로 둘러 쌓인 서재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사방 중 삼면이 책으로 높이 둘러 쌓여 있고, 나머지 한 면으로는 햇살이 비쳤으면 했죠. 이왕이면 동남향이길 바랐습니다. 제 키보다 높은 유리문을 통해서 햇살이 비치고, 그 햇살이 그림자처럼 끝날락 말락한 위치에 서재의 하이라이트인 멋진 나무 책상이 있길 바랐죠. 


햇살은 서재의 필수조건이긴 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직사광선이라는 게 책에게 좋은 것도 좋은 건 아니잖아요. 오랜 시간 햇빛을 머금은 책들은 머금은 색을 닮아 누렇게 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변해버린 색을 좋아하기도 합니다만, 이런 책에서는 묘한 책냄새가 나기도 하고, 새 책을 넘기는 촉감이 떨어져서 저는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은 이왕이면 방금 화장을 마친 그녀의 피부를 닮은 새하얀 색이 좋았습니다. 


나무 책상 뒤 책장 옆에는 반드시 높이가 어림잡아 내 키의 두 배 이상 될 것 같은 철제 사다리가 하나 있어줘야 제 맛입니다. 이 정도 사다리를 갖춘 서재는 되어야 '야, 이거 완전 소설가의 서재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해 봅니다. 


제가 누군가를 데리고 그 멋진 공간을 보여주는 것을 말이죠. 요즘도 계속 연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네이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서재를 소개하는 코너를 진행했습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33평의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시점에서 그렇게 멋지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서재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저 정도 서재를 가져줄 정도는 되어야 저렇게 유명한 사람이 되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더랬습니다.


하여튼 나도 네이버에서 어떤 기자가 나와서 제 서재를 소개하려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제게 묻는 것이죠. 


" 이 책은 어디서 언제 사셨던 건가요? 어떤 생각으로 구매하셨던 거죠? " 


그리고 전 당황합니다. 


" 저...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데요? " 


사실 책장에 꽂힌 책 중에는 10년, 15년, 20년이 넘은 놈도 있습니다. 한참 전에 어머니가 사셨다가 물려받아서 읽고 책장에 꽂아둔 놈도 있으니, 그런 것은 한참의 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도 있습니다. 


각각의 책들은 역사가 있습니다. 


그녀와 실연했을 때 샀던 책도 꽂혀 있고, 대학교에 처음 입학 했을 때 샀던 책들. 운동을 막 시작해보려고 건강 관련된 책들을 잔뜩 사둔 것도 있습니다. 책장 한켠에는 소설들도 잔뜩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영어로 된 책들도 잔뜩 쌓여 있습니다. (어차피 사놓고 읽지도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책들을 언제 사고, 어디서 샀으며, 왜 샀었는지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또 내가 이걸 언제 읽었더라? 다 읽기는 했었던가, 아니면 읽다가 말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책도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모든 책들이 서재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서재에는 완벽한 햇살이 비칠 것이고, 어딘지 모르게 다소 외로운 느낌마저 드는 곳이 제 서재가 될 것 같습니다. 


2. 서점의 기억 


어제도 서점에 들렀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서점을 들릅니다. 서점 옆에는 꽃집도 있습니다. 대체 이 꽃집에선 누가 꽃을 사갈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 가게를 지나칩니다. 


서점에 들어가면 사실 책이 보이는 게 아니라, 문구류가 먼저 보입니다. 


한 때는 서점에 비치된 문구류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제 책장 한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몰스킨(Moleskin)도 서점에서 산 물건입니다. 제 필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라미(LAMY) 만년필도 서점에서 산 물건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용돈을 모아, 비싼 샤프를 사는 것이 취미 아닌 취미였습니다. 누구나가 하는 것처럼 500원 혹은 1000원짜리 샤프로 필기를 하면 필기의 레벨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비싼 샤프를 사곤 했었죠. 3만원이 넘는 독일제 샤프로 필기를 하면, 왠지 우아한 학생이 된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요즘 들어 서점이 서점 같지가 않고, 만물상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 책상에는 Sony에서 나온 좋은 헤드폰이 있는데, 이놈도 서점에서 지른 것입니다. 지금 제 옆에 있는 핸드폰에 끼워져 있는 아이언맨을 닮은 빨간 색 케이스도 서점에서 산 것입니다. 


서점에 가서 사라는 책은 안 사고, 정작 엉뚱한 물건들만 잔뜩 사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서점에 가면 십중팔구 책을 삽니다. 


책을 살 돈이 없으면 서점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내 책도 아니고, 다른 귀한 분 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책이라 함부러 막 다루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읽습니다. 그러다 짜증이 납니다. 내가 이럴 바에는 내 돈 주고 산다. 


책 사놓고 처음 몇 페이지만 읽은 책도 한 두 권이 아닙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와 함께 서점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몇 번이고 아버지께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사지 못해서 아쉽다고 운을 띄워놨었더랬죠. 사실 대학생이면 돈도 없고, 책에 돈을 쓰기에는 돈 들어갈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긴 합니다. (그렇다고 책을 안 샀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만...)


아버지와 함께 서점에 가서 이 때가 기회다 싶었죠. 이 책, 저 책 다 골라놓고, "아빠 이거 나 다 읽고 싶어!"라고 말했죠. 그게 30만원 어치가 훌쩍 넘었는데, 별 말없이 책을 다 사주신 것이 놀랍긴 합니다. 내가 평소에 책 사고 싶었던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돈 주고 책 한 권 사는 게 그닥 어렵게 되어버리지 않은 지금도, 그 돈이 적지 않음을 아는 나이기에 그 때를 추억하며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