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책에 관한 생각

어릴 적 집에는 '어린이가 읽어야 하는 100 편 동화집' '어린이용 위인전' 따위의 책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동네 다른 아주머니들에게서 '이런 책들이 교육에 참 좋대.'라는 식의 검증되기 위해선 못해도 20~30년의 시간이 필요한 주장을 듣고 막무가내로 사온 책들이었죠. 정작 본인은 어린 시절에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어린이용 책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서, 이 위대한 어린이용 책들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이- 어린이책! 

수 백권의 동화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대한 편견을 많이 배웠습니다. 일단 못생긴 대머리들은 항상 안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 흰 피부의 젊은 금발 여성들은 착하고, 백치미가 있지만 항상 뒤통수를 당한다는 것. 이런 여성들은 꼭 머리는 작고 키는 큰 비율 좋은 남자들에 의해서 팔자를 피게 된다는 것. 항상 안 좋은 음모는 늙은 여자가 꾸민다는 것. 뚱뚱한 남자들은 멍청하고, 힘 쓰기를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남자들은 마르고 키 큰 남자에 의해서 한 방 먹게 된다는 것. 이상하게도 이런 모든 이야기들은 백인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 등등입니다. 

위인전을 통해서도 좋은 것들을 많이 배웠었죠. 위인들 중에 평범한 사람은 사실 몇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위인들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능과 신기가 눈에 띄는데 이런 재능이 보이지 않는 사람치고 위인전에 올라와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위인들은 놀라운 천재성을 잘 갈고닦아 세상을 놀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런 대단한 사람 주변에는 누구 하나 크게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고, (물론 이순신 장군을 시기한 원균 장군은 좀 특이한 경우였습니다만) 모두가 그런 위인들을 크게 칭송하여 세상은 참 좋아졌더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이런 위인전 내용이 참 시덥잖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자신이 존경하는 위인을 적는 부분이 있었는데, 참 시덥잖은 걸 물어보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방 책장에 꽂혀있는 100명이 넘는 위인들 중 한 명을 존경한다고 적느니 차라리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쓰는 편이 낫겠다. 그럼 일단 선생의 뻔한 기대(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에디슨 등을 존경한다는 대답)를 깨줄 수 있고, 그리고 혹여나 그 얘기를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하면 두 분이 참 좋아하시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 말고도 아버지를 쓴 사람이 몇 명 더 있어서 실망하기는 했습니다만, 이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참 좋아하셨죠. (정작, 어머니 본인은 밤이면 밤마다 나에게 아버지를 욕해댔으면서.) 

(괜찮은 어린이 책도 있었습니다. 우주의 비밀, 생명의 신비, 생활 속 과학 이론을 다룬 잡학과 관련된 어린이 만화였는데 이 대단한 만화책 시리즈는 저희 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희 옆집 여자애네 있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네 놀러간다는 것을 핑계로 그 책들을 정말 수십 번을 돌려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지금은 그 책의 내용들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지만 말이죠. 원래 좋은 건 기억에 남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