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허세

어릴 적엔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허세였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 심지어 인적이 드문 동네길에서 걸어가고 있을 때, 난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스스로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같은 공간 속에서 딴짓하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우월감을 느꼈었다. 10년 전, 20년 전이나 요즘이나 여전히 대중 공간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 때문에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어딘지 모르게 비범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리처드 H. 스미스의 '쌤통의 심리학'에도 이와 관련된 설명이 나온다. 리처드에 따르면 타인을 상대로 느끼는 우월감은 삶의 활력소가 되며, 자존감을 키워 살아가는데에 힘이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존감이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주변에 잘나가는 사람의 실패하는 모습을 통해 기쁨과 자존감 향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논문을 엉터리로 썼다는 사실이 나중에 들통난 어느 모범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그 전에 다른 연구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표준적인 자존감 측정 질문지를 작성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이 나중에 모범생의 실패를 알게 됐을 때 느끼는 즐거움("미소가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혹은 "그 일이 즐거웠다" 같은 항목들)의 정도는 그들의 자존감에 따라 달랐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모범생의 실패를 더 통쾌하게 느꼈다. 

어떤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학생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몇 가지 본초적인 '우월성' 욕구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폭력적인 우월성, 신체적인 우월성 그리고 지적인 우월성. 이 3가지 우월성의 감각 중에서 가장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 '지적인 우월성'이 아닐까? 가장 쉬운 증명 방법은 아무래도 학업성적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을 때, '나의 학업성적은 우수합니다.'라고 쓰여진 스티커를 붙여놓고 걷는 것이 아닌 이상, 지적인 우월성이 인정받기란 다른 2가지 우월성에 비해서 증명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학창시절 난 3가지 우월성 중 지적인 우월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었고 이 때문에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이 우월성의 감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책을 펴들고 그것을 읽는 것이었다. 책의 수준은 두꺼우면 두꺼울 수록 좋았고,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좋았다.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된 책도 좋았다. 혹은 두꺼운 책들, 혹은 어딘가 입증된 곳에서 추천 받은 책들이면 더욱 좋았다. 

서울대 추천도서 100선은 나의 허영심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서울대 추천도서에 포함된 책들 중 상당수를 중`고등학교 시절에 접했었다. 물론 제대로 끝마쳐서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초반 몇 페이지를 참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이 때문에 한참 시간이 흘러서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던 책도 몇 권 있다. 그런데 좀 다른 얘기를 해보자. 정말로 서울대 교수들은 서울대에 들어올 학생들이 이 추천도서 100선들을 다 읽기를 바랐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서울대 추천도서 100선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미 20년이 지난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인데,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이 서울대 교수들은 오로지 100권의 책이 최고의 추천도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천해야하는 책들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고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서울대 추천도서 중에는 1970년도 즈음에 나온 책도 버젓이 존재한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선정된 책들은 서울대의 어떤 교수가 어떤 목적으로 선정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신빙성 없는 추천도서들이 여러 서점가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도 다소 놀라운 사실이긴 하다. 여튼 이런 선정도서들은 우월성을 통해 건강한 자존감을 획책하려는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제는 그렇게 책을 읽는 것도 끝나버렸다. 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주로 전자책을 스마트폰을 통해서 읽는다. 누군가가 언뜻 보기에는 한심한 현대인의 전형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중독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중독이라는 것을 논하기에는 이미 너무 생활이 되어버린 까닭에 이게 스마트폰 기기에 중독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전자책에 중독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중독된 모습을 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중독되어 버린 것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겠다. 물론 내 허세가 옅어졌기 때문에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요즘 같이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서 종이책을 들고 읽어봤자 시대에 뒤쳐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약간은 있고, 전자책을 읽고 있으면 괜스럽게 내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기분이 좋기 때문인 것도 있다. 아니면 그냥 전자책 자체가 편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자책이라는 것은 종이책에 비해서 굉장히 편리한 점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책 듣기 기능(TTS)이다.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상대하고 있다보니 눈이 피곤하고 뻑뻑한 경우가 많은데 전자책으로 책을 읽으면 읽고 있다가도 바로 듣기 모드로 전환해놓고 눈을 감고 있기만 해도 되니까.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