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8. 4. 16. 23:54
가슴이 열린 채로 묶여 있었다
유약이 쏟아졌다
유약을 뒤집어쓰고 벽을 오른다 생각했다
누워 소변을 보고 누워 부모를 기다리며
누워 섬광을 수확하고
언제나고 눈을 뜨면 가슴이 열린 채로
묶여 있었다 누가 인간을 나무처럼 만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다만 일어나
실눈을 뜨고
푸른 간격으로 떨고만 있는 아이들에게
안대라도 씌우고 싶었다 
- 성동혁 시집 <6> 中 - 

사실 나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알아서 움직임을 상실한다. 그냥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서 홀로 그냥 오르기를 기대한다. 어릴 땐 오른다는 개념이 그냥 내 스스로 오르기만 해도 되는 줄 알았다. 나팔꽃이 막대를 따라 오르는 형상을 보며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는데, 지금은 내 스스로가 나팔꽃은 커녕 잡초도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바닥엔 마름만 가득하다. 물컹물컹한 비가 온 다음 날을 기대하지만, 비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건 애초에 내 스스로 움직임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어떤 변화가 오길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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