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3. 12. 23:29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이 물음은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려운 역사의 덩어리입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은 황금과 향료에 대한 탐욕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크리스토퍼)'는 콜럼버스의 이름풀이로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과학적 탐구로 격상시킨다거나, 이사벨라 여왕과 후아나 공주에게 바치는 바닷사나이 콜럼버스의 연정으로 격하시킨다는 것은 더욱 가당찮은 일입니다. 
1. 신영복 <더불어숲>, 랜덤하우스 중앙(주), 1998

서쪽으로 간 것이 단지 콜럼버스 혼자 해낸 일이겠는가. 인류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로 향했을 때, 달에 첫 발을 내딛은 사람이 닐 암스트롱이라고 해서, 오직 그의 의지만으로 달을 가기로 했었겠는가. 러시아와 미국의 정치적인 상황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그보다 앞서 독일에 있던 유능한 과학자들이 우주 탐험을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마련했던 덕택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앞서 인간을 우주로 이끌었던 수많은 공상과학소설들이 유럽의 많은 과학도들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었던 덕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더욱 앞서서 공상과학소설이 발전할 수 밖에 없게 했던 유럽의 사회적 기조가 한 몫을 했다. 

콜럼버스는 단지 유럽 서쪽으로 바다를 건넌 인류를 대표하는 아이콘일 뿐이지, 오로지 그의 의지 하나만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 하는 건 과한 생각이 아닐까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대항해로 진출하여 경쟁을 시작했던 것이 한 이유일테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요구사항이 뒤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콜럼버스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그를 부추겼을 수도 있고, 그의 경제적 사회적인 상황이 그를 그 길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너무나 단순해보이는 인과 관계마저도 그 바탕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면, 굳이 세세한 팩트를 체크해보지 않더라도 아주 오래 전에 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뿌리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재밌는 건 같은 작업을 나에게 적용해보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여러가지 활동들과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의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것도 나의 의지에 의해서 마구잡이로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결국 어떤 연원을 갖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행동들을 아주 단순한 인과관계로 따져서 분석해보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은 내 자신이 무엇보다 잘 증명할 수 있다. 

하물며 내가 그럴지언대, 다른 사람은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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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