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3. 7. 23:29
10살 때 쯤 '내게는 빨간 색이 친구들에게도 빨간 색일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순수한 근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빨간색인데, 내 옆에 앉아 있는 짝은 검정색을 좋아했다. 색깔에 어떤 명확한 우위를 이야기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난 순수하게 빨간색처럼 예쁘고 명쾌한 색은 없다고 생각했고 내 짝꿍도 같은 이유로 검정색을 좋아했다. 

그런데 색맹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색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인간은 시각 세포의 숫자가 (미세하게나마) 다르기 때문에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보고 있더라도 각자가 그 사물을 뇌에서 조영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것이 아닌가? 하물며 인간끼리도 이처럼 다른데, 다른 생물이라면 얼마나 더 다를까? 파리가 보는 세상은 어떨 것이며, 고래가 보는 세상은 어떨까? 

세상은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가정조차도 '물질은 존재한다. 물질만이 존재하다.'라는 관점을 갖고 있는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물질이라는 것은 명확히 같은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며, 단지 그것이 보여지는 방식이 주체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난 의심스러웠고, 지금도 여전히 의심스럽다.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결국 나를 통할 수 밖에 없지 않나. 나의 신체와 뇌를 통해서 구성된 관념이 대상의 형질을 뇌 안에 본디 그 형질과 유사하게(?) 그려낸다. 그런 뒤에야 나는 그 형질을 통해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데 만일 이런 생각조차도 모두 관념 안에 있는 것이라면?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나머지 모든 것들이 사실은 0,1,0,1과 같은 컴퓨터 코딩에 의해서 구축된 관념의 확장이라면 유물론에 근거해서 굳건하게 믿고 있는 물질은 없는 것임에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그 물질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은 그 사람들조차도 나에게는 타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물질이 있다고 판단하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규정되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이런 걸 의심했던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수많은 철학자들과 그 밖에 철학과 관련없는 일을 하면서도 이런 종류의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던 사람들이 가끔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했던 흔한 생각일테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전제된 세상에 살아가도록 나의 관념이 조종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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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