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3. 4. 23:40
내가 고등학교 때 설정한 기준이긴 한데, 내가 접해본 사람 중에선 가장 편지를 잘 쓴다고 생각한 사람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였다. <빨간 머리 앤>을 보면 주인공 앤이 다이애나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실제로 이 소설이 서간체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편지의 형식을 띤 부분이 자주 등장하는데 고등학교 때 그 부분을 읽으면서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엔 편지 세대가 아니긴 하다. 편지를 한창 쓸 나이 쯤엔 이미 이메일이 잔뜩 발전해버린 탓에 편지라는 매체를 좋아했음에도 그걸 쓰거나 받을 만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기회가 닿으면 편지를 쓰려고 했던 덕에 친구들과 꽤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지금도 책상 서랍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나 연인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이 한 가득 있다. 

하지만 나보다 바로 윗세대만 올라가도 내가 지금 보관하고 있는 편지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편지를 주고받았을 테고, 그들이 많은 편지를 썼던 경험에 맞춰 어떻게 편지를 써야할 지에 대한 감각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인사말)(날씨 안부)(본론)(마무리)(끝 인사 - 혹은 총총)과 같은 형식들을 뛰어넘은 매력적인 편지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것이다. 최소한 나의 아버지가 아주 어릴 적 내게 써주었던 편지가 그런 느낌이었다. 1페이지가 안되는 짧은 편지는 시덥잖은 날씨 안부 따윈 갖다치워버리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며 내게 꽤 좋은 인상을 전해 주었다. 물론 그와 같이 반드시 본론으로 넘어가는 편지가 꼭 최고의 편지라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지. 

<빨간 머리 앤>에서 봤던 편지는 꽤 정형화된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날씨 안부도 있었던 것 같다), 문장이 깔끔하고 내가 보통 편지를 썼을 때 흔히 저지르는 바보 같은 실수들, 예를 들어 했던 말을 또 하거나 평소에 글쓰는 게 너무 어색했던 나머지 주부와 술부가 완전 맞지 않는 식으로 글을 쓰는 부분들이 전혀 없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소설 속에서 앤 셜리가 쓴 편지라기 보단, 사실 몽고메리 작가가 직접 쓴 편지이지 않나. 그리고 단순히 작가 혼자서만 썼다기엔 그 글을 읽고 수정한 편집자도 있을 테고,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번역가가 읽었을 테니 최소한 2명의 사람이 함께 읽은 편지일 것이다. (실은 그보다 더 많겠지만) 그러니 그 편지글이 완벽한 편지가 되지 않기는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읽었던 그 편지가 내 머릿속에 몇 십 년 동안 자리하면서 계속 어떤 기준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편지글이라는 건 자고로 이래야 한다, 라는 식으로. 그러고 보니 <빨간 머리 앤>도 읽지 않은 지 한참 된 것 같다.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 


'잡문 > 기타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는 빨간 색이 너에게도 빨간 색일까  (0) 2018.03.07
4년만에 워킹데드를 다시 보면서  (0) 2018.03.05
김치찌개  (0) 2018.03.02
집 나가면 몸이 고생  (0) 2018.03.01
지혜와 전념  (0) 2018.02.28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