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7. 6. 17. 15:13

종로사가
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 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는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없이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 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종로사가'를 읽은 감상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시간을 인정하고 함께 길을 걸어간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른다. 처음 내가 서울 관악구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인식했을 때, 앞으로 10년 후 그리고 20년 후에 누구와 함께 길을 걷게 될 지에 대해서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그것이 정해진 시간에 따라 정해진 만남을 이룬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다고 느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살아가면서 '길'에 선다는 건 참 평범하면서도 뻔한 것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진지하지 않은 농담을 나누는 편이 낫다고 느낄 때가 참 많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소개한다면 우리는 A라는 근거와 B라는 근거를 모아 아, 이 사람은 85점짜리 인생이구나, 이 사람은 54점짜리 인생이구나를 평가한다. 심지어 입밖으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사람을 두고도 그가 갖고 있는 비언어적인 행태를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 평가라는 건 명확히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할텐데, 그 기준이란 건 함께 모인 사람들끼리 대동소이한 경우가 태반사다. 

하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딘지 모르게 그 사람이 걷고 있는 길에서 어떤 믿음이 느껴지고, 그것이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그다지 큰 관심이 가져지지 않는 일이다. 난 그걸 설렘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설렘이라고 말하면 어딘지 모르게 순간 타오르다가 식어버리는 등불 같은 느낌이다. 등불이 꺼지면 우리는 그 등불의 불빛을 보며 갈피를 잃던 시야를 다시 되찾고, 다시 정답을 향해 걸어가게 될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서서히 차오르는 눈물 같은 것이지,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불빛의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땐 가슴 한 구석에서 눈물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눈물이 가슴에 쌓일 때, 어딘지 모르게 충만하고 기쁘며 슬프다. 그게 참 좋다. 

황인찬 시인이 쓴 '희지의 세계' 시집 중 '종로사가'를 보면서 난 이런 생각을 했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