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국내소설2017. 4. 10. 22:01


저자 : 윤성희
출판사 : 문학동네
초판 발행 : 2016년 4월 21일
전자책 발행 : 2016년 12월 19일 

1. 책에 대한 느낌 
얼마나 사소한 부분까지 관찰할 줄 알아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대단한 영웅이 등장한 것도 아니고, 끔찍한 사건을 조우한 것도 아니며, 훌륭한 주제 의식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당장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서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들 중 하나를 붙잡고 '당신 얘기 좀 해봐요.'라고 물어봅니다. 그는 '뭐야, 이 미친 것은'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맙니다. 어스름이 지고 저녁이 다가오면 집에 가는 길에 한낮에 받았던 그 미친 것의 질문이 생각나서 혼자 그 질문에 답해봅니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용케 주워 듣고는 책에 조용히 담아서 들려줍니다.  

책은 잘 읽히지 않는 편에 속합니다. 책 속 인물들은 정해놓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기 보다는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신이 지향하는 (혹은 전혀 지향하지도 않는) 방향점으로 움직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보트 뒤에서 줄을 잡고 수상스키를 타는 서퍼처럼 이리저리 이야기의 물결에 흔들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같기도 한데, 그건 아닙니다. 대개 평범한 시간 순서로 이야기가 흘러 갑니다. 복잡한 액자 구성도 없습니다. 하나의 중편소설은 약 이틀에서 일주일 정도를 이야기합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따로 통제하지도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이야기는 스리슬쩍 그 옆을 따라갑니다. 이야기들이 지루할 법도 한데, 거기서 책 속 인물들은 묘하게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합니다. 지루한 건 맞습니다. 물론 정신 차리고 들어보면 맛이 꽤 괜찮습니다. 

인물 관계 속에는 욕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야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 간의 격렬한 경쟁 구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나빴고, 누가 좋았다는 선악구도 같은 것도 없습니다. 상처 입은 이야기들은 과거로 접혀있습니다. 상처 입더라도 비난하기보다는 한 번 비틀어서 흘려 보냅니다. 

윤성희의 문장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수식어는 최소한으로 쓰였습니다. 인과 관계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문장들이 너무 짧아서 속독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의 관계가 한 눈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묵독이 어려운 편이라 음독하는 것이 편합니다. 오히려 음독을 권장하는 문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문장을 물 흘러가듯 써내려갔을리가 없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고쳤을 겁니다. 연필을 적당히 뭉툭한 정도로 남겨놓고, 꾹꾹 눌러 써내려간 느낌이 듭니다. 

어떤 책들은 아무리 재밌어도, 담아가고 싶은 문장이 하나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책들은 아주 대놓고 아포리즘을 남발해서 나 좀 담아가쇼 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런 책이 아닐까요. '베개를 베다'는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만일 윤성희 작가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개그맨이 되지 않았을까요? 뻔히 보이는 이야기들을 살짝 살짝 비틀어낸 문장들. 그가 쓰는 문장들은 정해진 구도가 깨지는 쾌감을 전해줍니다. 집에 있는 풍경도 길을 걷는 풍경도 소설 속에서는 살짝 살짝 비틀립니다. 잠자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면서 피식 웃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입니다.' 그 글을 볼 때마다 M은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래서 변비까지 걸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손금에는 자식운이 없다고 했다. 그건 어머니를 짝사랑했던 철물점 사장이 한 말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 손을 한번 잡아보려는 속셈이었는데 손금에 자식운과 결혼운이 없다는 걸 보고는 같이 저녁 먹자는 말을 취소했다. "자기는 삼대 독자라나." 암튼,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사주를 보았다. 사주에도 자식운이 없다고 나왔다. "그래서 결심했지.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정말이야."

둘은 늘 무슨 백화점 앞 광장에서 만났는데 남자는 항상 십 분씩 지각을 했다. 언니는 저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남자에게 천천히 오라고 손짓을 하는 순간이 좋았다고 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꽤 좋은 인간처럼 느껴졌다고. 어쩌면 자신이 사랑한 건 그 남자가 아니라 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릴 때 자주가던 단골집이 있어야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너그러운 사람하고 단골집이 무슨 상관이야. 말도 안 되는 얘기 좀 그만해. 아내가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내는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만나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가 헤어졌지만.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까? 아빠는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새벽에 짐을 쌌다. 엄마의 앞에 나타난 아빠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무릎 연골이 닳을 때까지 살아보자고. 나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는 서로 부축해가며 계단을 내려가보자고. 물론 엄마는 아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러자. 그 말만 반복했다. 

2.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이야기 
1) '날씨 이야기' 편에서 '나'는 대형 크레인의 꼭대기에서 빨간 불빛이 반짝이는 간격에 맞춰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행동을 합니다. 이처럼 일상의 순간에서 나를 한순간 사로잡았던 순간이 있다면 그건 언제인가요? 

2) 제육볶음과 두루치기와 주물럭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3) 낮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나요? 왜 낮술을 먹었나요? 

4) 당신의 십대와 이십대를 한 마디로 하자면 어떤 시기였나요? 

4. 함께 읽거나 보면 좋을 콘텐츠
- 책 :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 

4. 3줄 요약
- 한 움큼씩 가득 쥐어서 자꾸 입으로 가져가고 싶어지는 소설.
- 호수에 조약돌을 하나 던지면, 제비 차듯 퐁당퐁당 뜀박질 하는데, 그런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 회사를 땡땡이 치는 날에 읽어보고 싶은 책 1위.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