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9. 10. 23:35
생산과 소비 
난 살면서 거의 모든 일에 대해 2가지 선택지를 얻었다. 생산하거나, 혹은 소비하거나.  

물론 보통의 경우 소비가 생산보다 쉽다. 예를 들어, 영화를 예로 들어볼까. 여기서 소비란 영화를 보는 것이고, 생산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영화를 보는 건 영화관에 가거나 집에 있는 컴퓨터로 영화를 보면 끝이다. 아무리 오래 봐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짧은 영화는 1시간 짜리도 있다. 반면, 영화를 만드는 건 훨씬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더불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이폰만 달랑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만드는 일이야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그걸 영화라고 쉽게 부르긴 어렵다. 영화엔 시나리오로서 갖춰야 할 영화만의 형식이 있고, 배급사도 필요하고, 연기자도 필요하다.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 영화를 만들고자 자금을 융통할 때부터 수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홀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든 영화를 다른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영화라는 특수한 소재가 아니어도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일들이 다 생산하는 것이고, 소비하는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 vs 음식을 먹는 것도 한 예이다. 책을 읽는 것 vs 책을 쓰는 것. 노래를 듣는 것 vs 노래를 부르는 것. (조금 더 심화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 vs 노래를 만드는 것) 회사에 다니는 것 vs 회사를 만드는 것. 가르침 받는 것 vs 가르치는 것.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까지 포함한 모든 비밀스러운 일들까지도 전부 생산과 소비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삶의 행태는 '생산' 혹은 '소비'라고 나눠보도록 하겠다. 이 2가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지점이 상당히 많겠지만, 가정하고 넘어가보자. 

많은 현대인이 느끼는 자유 혹은 선택권은 생산과 소비 중에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을까? 아마 소비 아닐까? 내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자유를 가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혼자 어떤 것을 생산해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제품의 사양은 점점 고도화되어가고 공장화, 자동화를 넘어 AI가 스스로 생각하여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드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개인 홀로 어떤 걸 생산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물론 그 덕에 소비는 점점 윤택해진다. 어릴 적엔 빵집에서 고를 수 있는 빵이라고 해봤자 10종류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수많은 빵집에서 수십 종류의 빵을 골라 먹고, 거기에 더해서 같이 곁들여 먹을 잼과 치즈 그리고 버터 종류까지 아주 다양하다. 굳이 쇼핑몰로 나가지 않아도 목소리로 주문만 하면 강아지에게 먹일 사료를 살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책은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 몇 번 클릭하면 당장 코 앞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축소하는데,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늘어난다. 생산이 사라지고, 소비만이 가득 채워진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열정적으로 생산하는 몇 명이 있다. 지식을 가진 사람, 혹은 자본을 갖춘 사람이다. 그들이 생산한 제품 혹은 서비스는 단순히 한 명을 위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수십 만 명 아니, 수 천만 혹은 수 억명이 쓰는 제품이 된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과연 그 제품이 수 억 인구가 쓸 제품이 될 거라 감히 상상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생산이건 소비이건 그것이 가져오는 자유의 크기가 크면 클 수록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생산이 가져오는 자유의 범주는 소비보다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소비라는 것은 타인이 만든 자유이고, 생산은 내가 만든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서 소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는 명확하고, 아무리 하찮은 생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져오는 기쁨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지점을 망각하고 자꾸 생산하는 것을 등한시 한 상태로 '어떻게 해야 남들보다 더 소비할 수 있을까, 더 훌륭한 소비란 뭘까'라는 생각에만 빠져드는 것 같아서 스스로 아쉬울 뿐이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