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외국소설2017. 9. 30. 22:25

저자 : 줄리언 반스 / 옮긴이 : 최세희
출판사 : 다산북스
초판 1쇄 발행 : 2012년 3월 26일
전자책 발행 : 2013년 9월 25일 

1. 찌질하다, 찌질해. 
정말 다행이다. 이젠 내가 과거에 했던 '찌질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그 행동들이 쉽사리 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 때 이불을 펑펑 차대며 부끄러워했던 나의 과거는 이젠 장기기억 속에서조차 완전히, 깨끗이, 기억 속에서 숨겨졌다. 무의식에 잠자고 있을 테지만, 난 결코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 '토니 웹스터'는 놀랄 정도로 훌륭한 기억력을 발휘해서 자신이 했던 수많은 찌질함의 역사를 서술한다. 

소설 초반부, 토니는 학창시절 함께 어울렸던 에이드리언이란 친구를 기억해낸다. 토니의 기억 속 에이드리언은 지적 능력과 철학적 성찰이 뛰어난 재원이었고, 토니 본인과도 4명의 패거리로 지내던 친구였다. 에이드리언은 패거리 중 가장 뒤늦게 어울리기 시작했으나, 그가 갖고 있던 철학적 성찰의 여파로 무리 중에 가장 동경의 대상이자, 그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고 에이드리언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를 소개시켜 주지만, 이후 토니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에이드리언에게서 토니의 전여자친구와의 교제를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받으며 심각한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얼마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손목에 칼을 그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설은 노인이 된 토니가 과거를 회상하고, 이후 자신의 과거 속에서 명쾌하지 않았던 기억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때문에 소설의 화자는 수십 년 전 과거를 바라보는 주인공 토니의 시선으로 그려지며, 이 때문에 소설 속에서 토니가 설명하는 많은 묘사들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추측이나 감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베로니카의 오빠 잭은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건장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세상만사가 다 웃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여동생을 곧잘 놀려먹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는 내가 뭔가 웃기는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듯했는데, 자기 쪽에서 그런 감정을 먼저 드러내는 법은 절대 없었다. 

어느 날,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받는다. 그곳에서 토니는 전형적으로 순진하면서도, 의심많은 눈초리로 베로니카의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하는 행동들이 마치 자신을 평가한다거나 깔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작 소설 속에서 가족들이 보인 행동 중에, 토니의 주장이 실제라고 보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런 그의 생각이 맞으려니, 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서 그가 했던 많은 생각들이 뒤집히고, 오해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의 행동이 갖고 있던 찌질함과 한심함을 드러낸다. 부끄럽게도, 난 주인공이 보여준 모든 태도에 지극히 공감이 간다. 

내가 수십 년 후에 느끼게 될 그 많은 찌질함들이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오늘 나조차도, 미래에 돌이켜 보았을 때는, 얼마나 한심해보일까. 괜히 부끄러워진다. 

2.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문구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 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 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차가 점차 풍화되어 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내 경우는 그런 문제로 신경 쓰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남자들마다 끌리는 유형은 각기 다르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3.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3줄 평 
- 어린 시절이 갖고 있는 '찌질한 속성'을 이보다 더 잘 재현한 소설을 보지 못했다. 
- 후반부를 제외하면 그다지 재밌는 편은 아닌데, 문장의 힘으로 계속 읽게 된다. 
- 사실 이 소설은 좀 짧다. 엔딩 보고 2번 째 다시 읽으라는 작가의 배려같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