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4. 1. 23:49

오랜 만에 시간을 내서 영화를 봤다. <레디 플레이어 원>. 요즘 가장 핫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영화이다. 

영상미가 압도적이다. 모든 장면들이 신선하고,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전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구조물들이나 화려한 장면들이 모두 CG로 구현되었다. 그 때문에 2D로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3D로 보는 것이 더 좋다는 평도 있었다. 

사실 내가 선택한 건 2D이긴 했는데, 3D를 선택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십여 년 전에 <매트릭스>를 처음 봤을 때 느껴졌던 울렁거림이 일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VR을 끼고 가상 세계로 넘어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선 내가 VR을 끼지 않았음에도 멀미감이 일어서 자칫 그 장면이 길었으면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그 정도로 영상이 역동적이고 화려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 놀라운 건 여러 패러디 장면들과 캐릭터들. 수십 년 간 즐겨왔던 미국과 일본의 캐릭터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100% 동감하긴 어렵지만, 미국 문화에 푹 빠져 살아왔을 오타쿠(GEEK)들이라면 분명히 만족할 만한 요소들이 넘쳐난다. 장면 속도 전환이 워낙 빨라서 대체 어떤 캐릭터들이 등장했는지 하나하나 계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5천 여 캐릭터가 숨어 있다고 한다. 

영상미나 캐릭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전형적인 주인공. 주인공이 하는 행동에 대해선 다른 조연들이 딴지를 걸지 않는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캐릭터가 죽고 수많은 돈을 잃어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주인공이 어떤 보상을 해주지 않아도 주인공에 대해선 언제나 환호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빠르게 등장해서 그를 돕고자 하고,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절한 힌트와 보상을 준다. 경쟁이나 배신, 미묘한 인간관계 같은 요소들은 깔끔하게 배제되어 있다. 

어쩌면 이런 부분들은 우리가 즐겨하는 게임에 대한 패러디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부분의 게임이란 건 주인공이라는 절대적 히어로를 상정해두고, 그가 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하는 행동은 언제나 선한 방향이고, 그를 방해하는 이들은 언제나 악하다. 절대적 선악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어릴 적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몇 차례 친구들과 부딪치면서 현실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세상에 주인공이라는 건 나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인공으로서 게임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가끔은 조연처럼 자리를 비켜줄 필요도 있고, 바보 같이 흔들릴 때도 있고, 서로의 고집에 의해 심하게 부딪치다가 망가져 버릴 때도 있는 것을. 경험해보면서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사실 그런 면 때문에 <레디 플레이어 원>이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하긴 해도, 대리만족해주는 부분이 있긴 하다. 뭐, 굳이 그런 부분을 다 드러내며 영화를 만들면 그게 뭔 재미가 있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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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