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국내소설2017. 12. 25. 20:30

저자 : 나도향 
출판사 : 더플래닛
초판 1쇄 발행 : 2015년 3월 12일 (발표 : 1925년) 

1. 운명에 오차가 있지 않을까요
운명을 믿으시나요? 어렸을 때 상대성이론을 설명한답시고 시간의 형태가 마치 공간과 같이 쭉 늘어져 있음을 설명하는 잡지를 읽은 이후로 내 머릿속엔 운명이란게 분명 존재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지금은 내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어릴 적엔 종교지도자가 되고 싶어할 만큼 종교에 대한 믿음도 강했었는데, 종교가 내게 보여주는 기본적인 이론 역시 운명을 기본 바탕으로 두고 있었다. 기독교에선 베드로와 유다가 반드시 신을 배신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이들이라 설명하면서, 그들의 차이점은 결국 그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배신한 채로 남았는지로 설명하는데, 지금도 이런 설명은 매우 불확실하고 어처구니 없을 뿐이다. (만일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또한 그 운명이 진짜라면) 애초부터 배신하지 않을 운명을 가진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른들은 내게 '신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주신단다'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합당한 말인가? 유다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벙어리 삼룡이 같은 소설은 운명에 대한 일종의 저항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삼룡이의 삶은 비참 그 자체이다. 어려서부터 말도 못하고, 흉측하기 짝이 없는 외모에, 누군가의 종살이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삼룡이란 사람이 신의도 있고, 억센 면도 있어서 참 괜찮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갖고 태어난 것이 모자란 탓에 사람들에게 놀림받고 고통 받으며 살아간다. 

삼룡이는 연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신세 탓에 쉬이 누군가를 좋아하지 못한다. 물론 소설 마지막에 큰 사고가 일어나 불길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애정을 실현하고, 애모하고 있던 새색시를 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얼핏 이런 모습이 그의 운명에 대한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일 내가 지금도 운명론을 믿는 입장이었다면, 그것이 절대적인 100%의 확률이라고 믿었다면 난 삼룡이가 불길 속에서 새색시를 구하는 장면은 의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어떤 외부적인 사건에 따른 수동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삼룡이의 성격과 경험 상,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사건이었다고. 

그러나 너무나 당연히 보이는 것 가운데에서도 확률에는 오차가 있다. 모든 일이 완전히 결정되었다고 말하기엔 관찰자로서의 시선이 갖고 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확률의 오차가 사람에게는 어떤 살아숨쉬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닐까? 사람이 그저 알고리즘이 아니라고, 살아 있다고.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았을 때, 그 색시를 내려놓았을 때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집은 모조리 타고 벙어리는 색시를 무릎에 뉘고 있었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사라졌을는지! 

2. '벙어리 삼룡이' 3줄 평 
- 짧지만 이야기도 담박하고, 깔끔해서 잘 읽힌다. 
- 노틀담의 꼽추랑 이야기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아마 참고해서 쓴 게 아니었을까? 
-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