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짝>이라는 짝짓기 리얼리티 쇼를 방영했던 적이 있다. 당시엔 인기가 대단했다. 수요일 저녁만 되면 가족들이 TV 앞에 모여서 방송에 나온 남녀들을 평가하며 즐거워했다. 물론 그 운영방식에 있어 논란거리가 지나치게 확산됨에 따라 2014년에 방송은 종영되었다. 지금은 그 때를 돌아보며 흑역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솔직히 <짝>은 재밌었다. 사람이라는 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언제나 신경쓰는 동물이지 않나. <짝>은 그런 관음증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프로였다.
일본에도 비슷한 콘텐츠가 있다. <테라스 하우스: 도시남녀>라는 프로인데, 일정 기간 동안 도시에 사는 남녀 6명을 고급 테라스 하우스에서 지내게 하면서 그 안에서 오고가는 연애와 관계의 이야기를 그린 프로이다. <짝>과는 미묘하게 그 관찰의 내용이 다른데, 더 장기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서 그런지 인간 관계가 발전하는 미묘함 같은 것이 잘 그려지고 있다.
사실 <짝>은 연애 감정이라던가 우정이라던가를 그려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동안 촬영을 했다. 사람의 관계나 생각은 무조건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부분에서의 한계를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테라스 하우스: 도시남녀>처럼 방송 기간이 길 경우(1시즌이 18화) 방송에 출연할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사실 이런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건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게 멘탈적으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짝>에 나올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대기업에서 강제로 사람을 출연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구한 사람들은 방송에서 과연 얼마나 진실성있게 행동하겠나.
그런데 난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방송들이 방영되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에 있어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처럼 평가되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방송을 보다보면, 혹은 방송을 보고나면, 사람들은 "저 사람은 참 괜찮아. 저렇게 행동했어야 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은 글렀네. 저래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특별하면서도 흔한 일이다. 확률적으론 어떤 정답이 있을 것 같지만, 개별 개체로 들어가면 각자가 다 다른 다양성을 지향한다. 누구나 미인을 좋아하고, 결국 미인이 미인을 차지하고, 미인이 아닌 사람은 미인이 아닌 사람을 대체제로 찾아간다는 논리는 매우 이상하다. 세상에 어떤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내가 너를 만나는 방식'은 각자가 다 다르다. 각자가 처한 환경도 다르고, 그 안에 정답은 없다. 어떤 우연이 있을 뿐이지, 그것이 마치 정답처럼 이야기 되었을 때, 인간이라는 게 인공지능보다 나을 것이 무엇일지 의심스럽다. 만일 모든 정답이 결정된 세상을 살고 있다면, 인간이 이렇게나 다양한 개체군을 갖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우주가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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