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2. 6. 23:56
운 혹은 운명이라는 것이 내 인생을 뒤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 나의 사고 방식을 지배하던 것이었다. 양자물리학에 대한 동영상을 몇 개 본 이후로 그런 생각은 더 강화됐다. (정작 난 물리학의 기본 법칙조차 모르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공간과 시간은 특정한 틀(Frame)에 이미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이런 생각은 우습게도 독실한 천주교 교리와 연계되어 더 강화됐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건 운이나 운명 같은 것이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기보단 삶에 대해 받아들이는 생각 혹은 태도만이 내 결정권 안에 있다는 것 뿐이었다. 사실 이 말도 우스운 것이 만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질들이 모두 결정된 운명이라면, 내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태도 역시도 결정된 것 아닐까?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다와 베드로의 죄는 같은 무게를 갖고 있다. 둘다 예수를 부정했고 예수를 속였다. 다만 유다는 배신한 채로 자살을 선택했고, 베드로는 반성했다. 그것이 그 둘을 가른 결정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 난 그 설명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둘이 갖게 되는 죄의 무게가 결코 같은 것이 아닐텐데 그리도 쉽게 그 둘의 죄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건 무슨 근거인가? 애초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 둘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텍스트로 쓰여있는 사람의 삶과 실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 다들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리고, 만일 그 두 가지 죄의 무게가 같은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태도에 따른 행동은 운명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아무리 작은 행동, 예를 들어 고개를 끄덕임조차도 세상에는 엄청난 영향을 준다. 나비효과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하물며 끄덕임이 그렇듯이 인간의 죄를 뉘우치거나 죄를 뉘우치지 않았을 때 하는 각종 행동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세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다. 내가 행동한 작은 움직임이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럼 정말로 나의 태도는 세상의 운명과 분리되어 있는 걸까? 

나의 작은 태도 변화 하나가 세상의 운명을 결정한다. 근데 운명과 태도를 나눈다고? 그게 가능한 말인가? 

따라서 난 운 혹은 운명 같은 것이 애초부터 없는 것이거나, 혹은 운 혹은 운명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태도가 그 중간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운명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이 정신건강에 그닥 좋지 않다고는 생각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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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