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9. 6. 23:48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게 좋아요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것에 대해 다룬 영화라던가 소설이라던가 만화를 참 좋아한다. 어릴 적엔 부모님이 사주셨던 중국 고전 만화 시리즈를 읽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매일 빠지지 않고 하루 1권 이상은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으니, 아마 못해도 한 권 당 최소 10번에서 100번은 돌아가며 읽었던 것 같다. 어차피 만화만 읽고 원문은 읽지 않았던지라, 각각의 고전이 갖고 있는 깊이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다만, 그럼에도 어디선가 그 고전에 나왔던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내가 읽었던 거네.'라고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동료와 함께 사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어떤 그림을 발견한다. 그 그림에 그려진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 여인과 함께 사는 꿈을 꾼다. 나중에 그 남자의 동료가 남자를 찾다가 발견하지 못해서, 사원의 스님께 남자의 행방을 여쭈니 그 그림 속에 있더라. 그 남자는 그 그림 안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 두려워 덜덜 떨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 남자를 불러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뭐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다. '세설신화'였던가, 그런 종류의 책에서 나왔던 이야기로 기억한다. 중국 고전에는 이런 종류의 얘기가 많은 것 같다. 굳이 장자의 나비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어딘지 삶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사준 고전 만화가 동양 고전이 아니라, 서양 고전이었다면 애초부터 '나'라는 경계를 명확히 가르는 연습부터 했을 텐데. 동양 고전은 '나'라는 존재도 어딘지 모르게 다 섞여 있고, 그 때문에 '내가 있는 공간'과 '다른 사람이 있는 공간'이 뒤엉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생각은 어릴 적에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 영향에서인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인셉션(2010)'이다. 뻔한 선택이다. 인셉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차라리 남들이 잘 모를 것 같은 인디 영화라던가, 50년대 혹은 60년대 영화를 골랐다면 있어보이겠지만, 애초에 내가 그런 영화들을 찾아볼 역량도 안되고, 찾아보느라 애쓰고 싶은 생각도 없다. 때문에 남들이 흔히 보는 많은 영화 중에 가장 '시간과 공간을 뒤틀어주는 영화'를 찾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꼭 드는 생각이, '지금 내가 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세상이 과연 실존하는 세상인가?'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세상에 대한 인지감각이 내가 느끼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라는 종류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술 한잔 한 것처럼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사실 뭔가 완전하다거나 확실히 정해져 있다거나 깔끔하다는 느낌이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살면서 느끼는 어떤 감각에 대해서는 뭔가 뒤엉킨 것 같은 것이 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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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