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책 독서에 관하여 

지금도 제 책상 옆 책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책들이 몇 권 있습니다. 그 중 대다수가 영어로 쓰여진 것이고, 일부는 일본어, 또 일부는 (대담하게도) 중국어도 있습니다. 대충 봐서 30권이 넘게 있는데, 이 중에서 제대로 마음먹고 끝까지 읽은 책이 있느냐 하면 딱 한 권 뿐입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쓴 '도쿄 타워'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에쿠니 가오리의 열정적인 팬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에쿠니 가오리 하면 떠오르는 책이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책일 것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베스트 셀러를 지켰던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집필한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7년 동안 오해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들을 다룬 책인데요. 사실 츠지 히토나리가 쓴 책은 읽어본 적도 없습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만 읽어봤습니다만, 그 원인은 인터넷에서 어느 지나가는 서평 때문이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쓴 건 읽을만 하고, 츠지 히토나리의 것은 별로다.) 

사실 지금 이 글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책이 어떤 줄거리이며,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그닥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그냥 그녀의 다른 작품인 '도쿄 타워'의 원서를 1년에 걸쳐 읽었고, 그 개인적인 소회를 적고 싶을 뿐입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제가 일본어로 그 책을 완전히 독파했었을 때는 (그것을 독파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말하는 것이 적합할진 모르겠습니다만) 그 책의 마지막 3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책의 전체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읽었던 '도쿄 타워'에는 제가 매 페이지마다 제가 모르는 일본어 단어, 그리고 그 단어를 읽는 방법이 아주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한국 책들과는 달리, 일본 특유의 문고판(성인 남성의 손바닥 만한 크기입니다)으로 나온 책이라서, 노트 필기를 하기엔 지극히 고통스러운 책이었습니다. 왜 굳이 그런 바보짓을 했느냐 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또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저는 군 복무를 하고 있었고, 짧지 않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활용해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면 무작정 일본으로 가서 대학원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일본어 실력이 출중했는가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군 입대를 하기 직전 따놨던 JLPT 3급 자격증은 일본어 실력으로 치자면,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봄직한 자격증이었습니다. 적어도 JLPT 1급 자격증을 그것도 높은 점수로 따내야 '아, 이 친구는 그래도 일본 대학교 1학년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했구나.'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최소한의 노력이라는 것이지, 충분한 노력은 아닙니다. 당시 저의 일본어 실력을 아직도 이해하실 수 없으시다면, 저는 일본어로 5줄 이상의 문장을 써내려가기 어려운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조금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몇 가지 교재들을 군대에 챙겨 왔습니다. 두꺼운 일본어 교과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아주 얄팍한 소설 책 한 권(그 얄팍함이 제가 '도쿄타워'를 선택한 이유입니다)과 작은 전자 사전이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교재였습니다. 

충분한 실력도 되지 않는 주제에, 그것도 알고 있는 외국어 단어가 몇 안되는 주제에, 그것도 특히 일본어로 된 책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임에 틀림없습니다. 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한자어들이 총출동을 했습니다. 제가 1년 동안 책을 읽으면서 공부했던 것은 일본어가 아니라, 일본어의 탈을 쓴 한자라는 놈들이었습니다. 일본어 소설 책에는 이 한자어들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안 적혀 있었습니다. 오로지 전자사전을 통해 하나하나 발음을 찾고, 한자를 찾고, 다시 일본어를 찾고, 그 일본어의 뜻을 찾고, 그 뜻을 통해 문장의 뜻을 찾고, 문장의 뜻을 통해 빌어먹을 비유가 섞인 소설의 뜻을 찾아야 했습니다. 3주 정도 이 방법을 지속하니, 이 방식이 정말 효과적인 공부 방식인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의심은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군대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새로운 교재를 찾을 수 있는 자유는 없었습니다. 현재 주어진 교보재를 총동원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연구 결과, 무식함이 최선임을 알았습니다.  

정신나간 짓을 몇 달 정도 해 나가자 50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이 순간부터 갑자기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앞서 나왔던 한자들이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이전의 한자는 새로운 한자를 유추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100페이지를 넘기는 쾌거를 맞이했습니다. 

이쯤 되니, 사실 책의 초반 줄거리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1페이지로 돌아가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200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1페이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습니다.

여기까지 적다보니 마치 멋진 일본어 공부 성공 스토리처럼 들립니다. 

틀렸습니다. 이 일본어 공부는 실패했습니다.

군대 전역 전, JLPT 1급을 응시했고, 가볍게 1급을 땄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3월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고, 방사능이 동일본으로 크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전 국내에서 취업하는 것에 성공했답니다. 

(물론, 전 작년에도 일본 여행에 다녀왔습니다. 하하하)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