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7. 9. 12. 23:45
저녁 7시부터 저녁 10시 사이 
고등학교 땐 야자(야간자율학습)을 했다. 고1 첫 야자 1주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혈기왕성한 남자애들이 그 좁은 공간에 모여 사각사각 펜과 샤프를 놀리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 광경은 본 적도 없었고,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배부른 상태라면 다들 잠이 올 법도 한데, 묘하게도 저녁시간엔 졸거나 잠자는 친구를 보기 힘들었다.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은 나와 몇 명 친구들에게 농담을 걸기도 했지만 약 3시간에 걸쳐 상당한 수준으로 집중해서 공부를 했다. 그 광경이 꽤 당황스러웠다. 야자라는 걸 상상도 못해봤던 터라 첫날엔 그저 교과서를 다시 읽는 수준이었다. 첫날 야자 때 난 아마 수학 교과서를 예습하고 있었다. 사실 난 당시 풍조와는 어울리지 않게 수학이라던가 영어 예행학습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3개월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이 시간을 두고 알 법한 사람들은 황금과 같은 예행학습의 시간이라고들 한다. 다들 수학의 정석을 한 번 쯤은 끝마치곤 했는데, 10-가, 10-나 형을 다 끝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1까지도 공부하는 대단한 녀석도 있었다. 첫 야자에서 꽤 모범적으로 생긴 친구 한 명이 수학 정석을 푸는 모습을 보고, 그날 바로 서점에 가서 수학 정석을 구매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수학을 공부했었다.  

그 날 이후로 난 그 시간이 좋았다. 매일 아침 7시마다 학교에 끌려가서 EBS 방송을 듣고, 학교 수업을 듣는 그 끈질기고 질척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도 나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지 않는 저녁 7시가 왔다. 창문엔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도 차분해진 느낌이었고, 학교가 내게 강요하는 어떤 사슬 같은 것이 헐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 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터라, 덕분에 난 꽤 많은 공부를 그 시간에 했다. 

그 때문일지 대학교에 와서 난 그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조금 슬펐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펴놓고 공부하려고 앉아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치거나 게임을 하는 편이 속편했다. (그런 핑계로)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읽은 책도 참 적었고, 공부의 양도 참 적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친구들에게 얘기해봤자, '미친 놈'이란 소리나 들었으니. 지금 와서 보면 친구들 말이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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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
독서/외국소설2017. 9. 11. 22:53

저자 : 파트릭 모디아노 / 옮긴이 : 권수연 
출판사 : (주)문학동네
초판 1쇄 발행 : 2016년 3월 17일 
전자책 발행 : 2016년 4월 25일 

1. 기억과 망각을 다룬 소설 
내 어릴 적 기억은 5살 때부터다. 엄마와 함께 한라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은 가파랐다. 난 내 신발 밑창 아래에 묻었던 흙이 기억난다. 그 당시엔 한라산에 제대로 된 등반 코스가 없던 것일까? 대체 왜 난 그런 비포장된 산악로를 걷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5살 때. 그리고 기억은 1년 정도 사라졌다가 6살 후반이 되어 다시금 되살아난다.

아마 10살 쯤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엔 나도 5살 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굳이 기억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난 생각했다. 부모님들처럼 어린 시절을 잊어먹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어렸을 때의 감정을 잘 기억해 뒀다가, 나이 먹어서 어린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소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기억과 망각을 다룬 책이다. 나이 든 소설가 다라간에게 두 남녀가 찾아온다. 그들은 그에게 수수께끼같은 사실을 제시하며, 다라간에게 과거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다라간은 처음엔 과거에 맞서는 것에 저항하지만, 어느 순간 그 스스로가 불청객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질문을 찾아 나선다. 다라간은 자신이 과거에 썼던 소설들, 자신이 갖고 있는 사진과 몇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아니 아스트랑'이란 인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소설은 끔찍할 정도로 불친절하다. 소설 초반부터 제시된 수수께끼는 소설이 끝나는 시점까지 결코 풀리지 않은 채로 끝없이 새로운 수수께끼를 내며 마무리된다. 대체 다라간은 어떤 과거를 보낸 것일까? 다라간과 아니 아스트랑은 어떤 관계인가? 다라간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인가? 소설은 단지 어떤 추측만을 남겨둔 채 그림자처럼 아스러진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떤 뚜렷한 서사가 그려지긴 보단, 시처럼 남겨지는 애매함 혹은 생각들이 있다. 

"내가 왜 널 데려가서 즉석 사진을 찍었는지 말해줄까?"
다라간은 그녀가 기꺼운 마음으로 이 화제에 접근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해가 지고 있었으니, 어둑발이 그 거실에서의 토로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해. 네 부모님이 없는 상황에서, 너를 이탈리아로 데려가려고 했거든. 그러자면 여권이 있어야 했고."

소설 독자평에 '모디아노 소설은 시와 같아서 좋았다'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2.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3줄 평 
- 추리소설처럼 시작해서, 시처럼 끝나는 소설. 
- 망각이란 주제를 소설 전체로 표현하는 듯 했다. 
- 한 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저자가 의도한 바일까? 


Posted by 스케치*
잡문/기타 잡문2017. 9. 10. 23:35
생산과 소비 
난 살면서 거의 모든 일에 대해 2가지 선택지를 얻었다. 생산하거나, 혹은 소비하거나.  

물론 보통의 경우 소비가 생산보다 쉽다. 예를 들어, 영화를 예로 들어볼까. 여기서 소비란 영화를 보는 것이고, 생산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영화를 보는 건 영화관에 가거나 집에 있는 컴퓨터로 영화를 보면 끝이다. 아무리 오래 봐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짧은 영화는 1시간 짜리도 있다. 반면, 영화를 만드는 건 훨씬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더불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이폰만 달랑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만드는 일이야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그걸 영화라고 쉽게 부르긴 어렵다. 영화엔 시나리오로서 갖춰야 할 영화만의 형식이 있고, 배급사도 필요하고, 연기자도 필요하다.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 영화를 만들고자 자금을 융통할 때부터 수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홀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든 영화를 다른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영화라는 특수한 소재가 아니어도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일들이 다 생산하는 것이고, 소비하는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 vs 음식을 먹는 것도 한 예이다. 책을 읽는 것 vs 책을 쓰는 것. 노래를 듣는 것 vs 노래를 부르는 것. (조금 더 심화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 vs 노래를 만드는 것) 회사에 다니는 것 vs 회사를 만드는 것. 가르침 받는 것 vs 가르치는 것.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까지 포함한 모든 비밀스러운 일들까지도 전부 생산과 소비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삶의 행태는 '생산' 혹은 '소비'라고 나눠보도록 하겠다. 이 2가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지점이 상당히 많겠지만, 가정하고 넘어가보자. 

많은 현대인이 느끼는 자유 혹은 선택권은 생산과 소비 중에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을까? 아마 소비 아닐까? 내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자유를 가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혼자 어떤 것을 생산해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제품의 사양은 점점 고도화되어가고 공장화, 자동화를 넘어 AI가 스스로 생각하여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드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개인 홀로 어떤 걸 생산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물론 그 덕에 소비는 점점 윤택해진다. 어릴 적엔 빵집에서 고를 수 있는 빵이라고 해봤자 10종류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수많은 빵집에서 수십 종류의 빵을 골라 먹고, 거기에 더해서 같이 곁들여 먹을 잼과 치즈 그리고 버터 종류까지 아주 다양하다. 굳이 쇼핑몰로 나가지 않아도 목소리로 주문만 하면 강아지에게 먹일 사료를 살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책은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 몇 번 클릭하면 당장 코 앞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축소하는데,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늘어난다. 생산이 사라지고, 소비만이 가득 채워진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열정적으로 생산하는 몇 명이 있다. 지식을 가진 사람, 혹은 자본을 갖춘 사람이다. 그들이 생산한 제품 혹은 서비스는 단순히 한 명을 위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수십 만 명 아니, 수 천만 혹은 수 억명이 쓰는 제품이 된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과연 그 제품이 수 억 인구가 쓸 제품이 될 거라 감히 상상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생산이건 소비이건 그것이 가져오는 자유의 크기가 크면 클 수록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생산이 가져오는 자유의 범주는 소비보다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소비라는 것은 타인이 만든 자유이고, 생산은 내가 만든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서 소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는 명확하고, 아무리 하찮은 생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져오는 기쁨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지점을 망각하고 자꾸 생산하는 것을 등한시 한 상태로 '어떻게 해야 남들보다 더 소비할 수 있을까, 더 훌륭한 소비란 뭘까'라는 생각에만 빠져드는 것 같아서 스스로 아쉬울 뿐이다. 


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