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기타 잡문2018. 2. 16. 10:57
어렸을 때 미술학원을 다녔었다. 7살 때부터 중3 때까지 계속 다녔었는데, 그 덕에 어설프게나마 그림 그리는 일에는 익숙해졌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내게 천재적인 자질이 있어서, 샤갈이나 고흐와 같은 화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내가 그린 추상화를 칭찬하면서, 미대 진학을 고려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은 절정이 되었다. 그 즈음 난 저녁 10시 쯤 하교하고나면 집에 앉아서 그림을 그려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그림을 올리고, 사람들이 감상평을 올리는 사이트였다. 그 당시엔 그런 게 꽤 인기가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실력자라고 나름 생각하고 있었다. 


또 나는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갖게 되는 계기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썼던 독후감으로 학교에서 상을 받았던 경험 덕이었다. 당시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별별 이름을 지어서 상을 줬던 탓에 그 상이 그리 대단할 것은 못되겠다만, 적어도 내게는 꽤 큰 자신감을 안겨줬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난 가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시를 올리면서,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이 남다른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익혔던 그림이나 글이나 다 비슷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살면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 공부하지도 않았던 것을 창조했던 경험은 없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나조차도 내가 평소에 자주 접하는 그림이나 만화를 따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시 쓰는 것 역시 좋아하기는 했지만, 결국 내가 학교 교과서에서 접했던 시인들의 시를 조금씩 조금씩 따라하는 것이 보통의 것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건 결국 완전히 없는 것을 써나가기보다는 내가 주변에서 보고 접한 것을 내 경험에 맞춰서 새로 짜맞추는 작업이었다. 어렸을 때 이런 사실에 대해서 확실히 인식하고 조금은 겸손했더라면 더 나은 글과 그림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바보같이 나 스스로를 천재로 생각했다가, 결국 벽에 부딪히면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사실 다른 사람 눈에 천재로 보이는 이들도 결국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조금씩 조금씩 엮어나가면서 성장했던 것을. 그 당시엔 몰랐다. 

생각해보면 모든 창조물은 가지치기의 과정이다. 중요한 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건 쳐낸다. 성장기 인간의 뇌를 보면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부분들의 시냅스는 더욱 강화되고, 잘 사용하지 않는 부분들은 감퇴한다. 또한 인간의 근육 역시 자주 사용하는 부분들은 서로 연결되어 굳건해지고, 자주 쓰지 않는 부분들은 그 연결이 사라져간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능력이란 건 없다. 이미 있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고 끊어지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내 주변에서 선택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의지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나, 내 주변에도 의지가 있음을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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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