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시, 에세이2017. 9. 24. 22:59
비등점의 한때
맨 처음
우리는 거위였어요
왼쪽 겨드랑이에 달린 귓불이었죠 
어쩌면 우린 둘 다 날개였는지도 몰라요
나누기도 자르기도 붙이기도
좋은 감정의 상태
연인일까요 부부일까요 남매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계단이었을지도 몰라요
딱지 접듯이 딱딱딱 접어 
압축 팩에 넣으면 
돌처럼 단단해지는 
홑이불이었는지도 모르죠 
눈도 코도 붙여서 
밤새 꽝꽝 얼려 놓아야 
겨우 사람이 되는 눈사람이었는지도 모르죠
때때로 우리는 각각
다른 프라이팬에서 볶은 
검은콩 검은깨 흑마늘이었는지도 몰라요
어쨌든 모두 기름이 되었거든요
유채 옥수수 현미 콩 포도 올리브 해바라기처럼 
결국 우린 물방울이 되겠지요 
입에 고인 침처럼
비등점이 아주 낮거나 비등점이 없는 
단 한 번의 기록 

- 조민 시집 '구멍만 남은 도넛' 中 - 


Posted by 스케치*